“남편이 다시 살자고 해요, 무서워요”
지난해 5월, 수미 씨는 7년 된 결혼생활을 청산했다. 여러 가지 일들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쳐간다. 시아버지께 냉대 받던 일, 몸살로 끙끙 앓고 있데 아버지 밥상을 잊지말고 챙기라며 출근하던 남편의 뒷모습, 새벽밥을 얻어먹으면서 고맙다는 말 한마디 없던 시동생, 첫 번째 가출로 처음 자신의 요구를 남편이 받아줬던, 그래서 새 출발을 다짐했던 설레임….
“입버릇처럼 하는 말, 잘못했다”
다시 집으로 돌아온 후에도 몇 번의 위기가 있었다. 종국에 수미 씨는 엄마역할만 하기로 하고 남편과 각방을 쓰기로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평소 알고 지내던 파키스탄 남자친구의 전화를 받았다. 그 전화를 밖에서 엿듣던 남편이 방문을 박차고 들어와 수미 씨를 때리며 나가라고 고함을 쳤다. 수미 씨는 남편을 설득할 기력도 남아 있지 않았다. 여러 번 남편이 생각하는 그런 관계가 아니라고 설명을 했는데도 남편은 수미 씨를 믿지 않기 때문이다. 수미 씨는 빈손으로 집을 나왔다. 사촌 동생네로 들어가 두문불출했다.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명료해 진건 더 이상 남편과 살 수 없다는 것이다. 두 아들의 부모로 살기로 합의하고 각 방을 쓴 지도 2개월이 지났다. 그런데 남편은 수미 씨의 사생활을 간섭하며 폭력을 휘둘렀다…. 함께 사는 것만이 최선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집을 나온 다음날부터 남편이 수미 씨를 찾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번에도 잘못했다고 한다. 만나서 얘기하자고 한다. 나흘이 지난 뒤에는 이혼서류를 준비했고 만나자는 연락을 받았다.
“잘못했다고, 용서해달라고 빌어라”
과정이야 어찌됐든 이혼을 하자고 한 건 남편이었다. 그럼에도 남편은 법정에서 마지막 순간까지 “잘못했다고 빌라”했다. 늦은 밤 집을 나가라고 내쫓은 남편은 수미 씨에게 한마디 사과도 없다. 무조건 수미 씨에게 빌라는 것이다. 남편은 자신이 수미 씨를 내쫓고, 이혼을 결정하게 된 동기가 수미 씨에게만 있다고 생각하는 듯 했다. 수미 씨는 이혼 수속을 하는 동안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남편의 요구에도 묵묵부답이었다.
“자식버린 에미가 뭔 낯짝으로 얘들을 만나!”
눈에 넣어도 아프질 않을 사랑하는 두 아들을 곁에 두고 싶었다. 그러나 이이들마저 데려오면 남편은 삶을 포기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차마 남편에게서 아이들을 데려가겟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헤어져 살더라도 아이들이 구김살 없이 생활하도록 곁에서 돕겠다고 했다. 남편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남편은 수미 씨를 자식 버린 에미로 낙인찍었다. 그래서 자식을 볼 자격이 없다고 했다. 집도 팔고 수미 씨가 모르는 곳으로 이사할 거라고 했다. 이혼 후 수미 씨는 바로 법원에 면접권 신청을 했다. 8개월 후 법원은 한달에 한번 두 아들을 만나고, 주일에 한번, 30분 동안 전화통화도 하고, 방학이면 보름정도 함께 지낼 수 있도록 결정해 줬다.
“지금이라도 잘못했다고 하면 받아 줄께”
재판이 진행되는 8개월 동안 수미 씨는 혹여나 남편에게 흠을 잡힐까봐 먼발치에서 아이들의 모습을 엿보며 가슴앓이를 했다. 이젠 당당하게 아이들을 만날 수 있게 됐다. 오랜만에 아이들과 만나 수미 씨는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첫 만남에서 아이들에게 옷을 사 입혔다. 시아버님께 드릴 작은 선물도 사 들려줬다. 두 번째 만나서 장난감을 사주려하자 큰아들은 안받겠다고 한다. 할아버지가 엄마가 사 준 옷을 쓰레기통에 버렸다면서 다시는 아무 것도 받아오면 안된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3번째 만날 때 큰 아들은 수미 씨를 만나지 않겠다고 했다. 다시 두 달이 지났다. 작은 아들도 안나오겠단다. 그날 밤 새벽, 잠결에 남편의 전화를 받았다. 남편은 지금도 수미 씨가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면 받아 주겠다면서, 아이들 생각해서 다시 합치자고 한다. 수미 씨는 안다. 혼자서 세상을 사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가족이 얼마나 소중한지. 하지만, 자신은 잘못이 없고 수미 씨만 문제 삼는 남편을 받아들일 수는 없다. 힘들었던 결혼생활이 생물 올리듯 떠올라 가슴을 쓰리게 한다.
-사진으로 보는 이주여성 삶이야기 ‘꿈의 나라에서’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