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탓티 황옥을 보내며
레티마이 투 /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 베트남 활동가
지난 7월 15일, 새벽에 일어나는 것은 잠이 많은 나에게 고문이었다. 그러나 얼마 전 남편에게 살해된 베트남 여성 탓티황옥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9시 30분까지 부산의 병원에 도착해야 했다. 집에서 서울역까지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타고… 다행히 5시 50분 서울역에서의 약속에 늦지 않았다. 다급하고 무거운 마음으로 나는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 실무자 두 명이랑 그렇게 오전 6시 KTX를 타고 부산으로 향했다.
몇 일전, 부산에서 한국에 온지 일주일 만에 정신병을 가진 남편에게 살해당한 베트남 여성의 소식을 들었다. 신문에, TV에, 인터넷에 그 여성의 사망 사건 관련한 보도가 많았다. 나는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에서 일하고 있기 때문에 부산에 있는 지부를 통해 다른 사람보다 일찍, 좀 더 자세히 소식을 알 수 있었다.
탓티황옥의 친정부모님도 딸의 장례식을 치르기 위해 한국에 왔다. 다른 베트남 친정 부모님 같으면 부모초청 비자로 한국에 놀러오든가, 딸이 출산한 손주를 보러 오든가 하는 이유로 한국에 왔을텐데, 이 두 분은 딸의 시체를 보러 이 땅에 와야만 했다. 그 심정이 얼마나 아팠을까?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딸이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일주일 만에 강도도 아니고, 딸이 의존할 수 있는 유일한, 딱 한 사람인 남편에게 살해당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얼마나 힘겨웠을까?
나는 그 부모님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났다. 나는 이 사건이 있기 전에는 탓티 황옥을 알지 못했다. 한번도 본 적 없는, 모르는 사람인 그녀의 장례식에 간 것이었다. 같은 베트남 사람으로서 황옥이 가는 마지막 가는 길에 유가족과 함께하고 싶어서 간 것이었다.
한국의 북부인 서울에서 남부인 부산까지는 기차를 타고 3시간이 넘게 걸렸다. 부산이주여성인권센터의 대표가 안내해준 덕분에 우리는 쉽게 황옥의 장례식장을 찾을 수 있었다. 황옥의 빈소에는 결혼식 때 찍은 사진이 영정사진이 되어 있었다. 그 사진을 본 순간, 참았던 눈물이 한없이 쏟아져 나의 감정을 억누를 수 없었다. 고인이 제일 있고 싶은 곳에 잘 가라고 기도하였다.
그리고 많이 울어서 눈물이 남지 않은 듯 힘없이 서있는 황옥의 부모님을 만났다. 어머니는 키가 작은, 딸을 먼 땅에 시집보낸 다른 베트남 엄마와 다르지 않았다. 아버지는 까만 피부에 어머니보다 키가 조금 더 컸다. 나는 황옥의 어머니에게 베트남어로 위로의 말을 하며 어머니를 안았다.
황옥의 부모님은 황망한 소식을 듣고 부인과 함께 조문을 온 한국 남편들을 지켜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거짓으로 딸을 죽음으로 몰아낸 중개업자를, 약효가 떨어지면 부모도 못 알아본다는 황옥의 남편을, 아들의 상태를 알면서도 의사소통이 전혀 안 되는 황옥에게 간병인 데리듯 떠넘긴 시집 식구들과 한국사회, 황옥의 죽음에 관련된 사람들을 원망하고 있었을까? 장례식에 찾아오는 모르는 한국 사람들, 베트남 여성들, 다른 나라 출신의 이주여성들이 귀한 마음을 가지고 오는 모습은 보였을까?
버스를 타고 화장장으로 향하면서, 장례식을 함께 준비한 부산 어울림의 베트남 활동가로부터 사건이 발생한 후 부산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장례식 준비 과정이 어땠는지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그를 통해 장례식 하루 전날, 베트남 이주여성 이십 여명이 이 사건을 맡은 사하경찰서 앞에서 철저한 조사를 요구하는 기자회견이 있었다고 들었다. 그 활동가는 황옥의 부모님이 한국에 입국할 때부터 부모님과 함께 장례식과 장례준비, 관련한 통역 등을 제공하며, 아픔을 참으며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얘기했다. 이런 활동가가 있어서 나는 너무 힘이 되고 베트남사람으로서 자랑스러웠다.
황옥의 마지막 가는 길에 어머니는 통곡과 함께 “내 딸아, 불쌍한 내 딸아”를 외쳤다. 어린 나이에 자기보다 27살이나 많은 남편을 믿고 한국에 왔더니 단 일주일 만에 남편에게 살해당한 그녀가 너무 불쌍했다.
황옥의 시신은 화장되었다. 화장장에서 1시간 15분이 걸려 화장이 끝났다. 나는 화장하는 것을 처음 보았다. 베트남에서 20년, 한국에서는 일주일. 이제 황옥은 그렇게 좁은 화장대에서 불에 타고 유족들에게 재로만 남았다. 화장이 끝난 그녀가 조그만 단지에 담겨 나오자 그녀의 부모님은 나는 알아들을 수 없는 ‘커메(khmer)’민족의 말로 무엇이라고 얘기했다. 아마 딸이 부모님과 함께 편안한 곳으로 돌아가자는 얘기가 아닐까 싶었다. 그 말을 듣고서 나는 황옥이 베트남 소수민족인 커메 사람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베트남의 시골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이틀 동안 장례식을 하고 땅에 묻었다가 3년 후에 다시 유골을 꺼내 다른 무덤으로 옮긴다. 무덤은 돌아가신 분의 집이기 때문에 집을 짓는 것처럼 무덤을 만든다. 그런 인식 때문에 무덤을 정갈하게 꾸미고 싶어 한다. 황옥의 부모님은 그렇게 할 수 없어서 아마 가슴이 많이 아플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부산에서 장례식을 치렀기 때문에 함께 하고 싶은 많은 베트남 친구들과 이주여성들이 가지 못 했다. 안타까운 마음에 급하게 서울에 있는 국가인권위원회 앞에서 황옥의 추모 기자회견을 열었다. 기자회견 제목은 <“나도 그 베트남 이주여성일 수 있습니다” - 이주여성들의 故 탓티황옥 추모 기자회견>으로 달았다. 결혼이주여성이면 누구나 그런 일을 겪을 수 있기 때문에 만든 제목이었다. 그리고 한국정부, 시민에게 주변에 있는 외국인들이 어려운 일을 겪고 있지 않은지 관심을 가져주고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법적으로도 중개업을 철저히 관리해야 한다고 우리들은 의견을 모았다. 제일 가까운 동사무소의 사회복지사가 동네에 사는 이주여성들이 몇 명 있고, 어떻게 사는지 관심을 가져주면 좋겠다는 의견도 나왔다.
나는 이번에 처음으로 기자회견의 사회를 보았다. 너무나 떨리고 긴장이 되었지만, 한편으로 사회를 보면서 느낀 점이 많았다. 이번 추모 기자회견은 이주여성들이 직접 기자회견을 열었고 사회도, 경과보고도, 발표도 모두 이주여성들이 했다. 다들 경험이 많지 않아 모두 긴장하고 떨었지만 끝까지 자신들의 의견을 말했다. 그런 모습이 너무나 훌륭하고 기자회견이 잘 마무리 되어서 매우 뿌듯했다. 같이 추모기자회견을 준비하자고 한 뒤로 서둘러 준비를 해 준 베트남 친구들, 다른 나라의 이주여성 친구들이 국가인권위원회 앞에 당당하게 서있는 모습이 자랑스러웠다.
탓티황옥이 다른 세상으로 가면서 앞으로 자기처럼 될 사람이 있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녀 때문에 우리는 이주여성들의 목소리를 낼 수 있었고 우리의 힘으로 서로를 지지하면서 우리 자신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그녀 때문에 슬프고 그녀 때문에 고맙다.
*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도 실렸습니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419622&PAGE_CD=N0000&BLCK_NO=3&CMPT_CD=M0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