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매혼적 국제 결혼 예방과 대책을 위한 국제 포름을 마치며.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단다. ‘모든 여성은 창녀다’ 자신의 성과 남성의 경재력을 교환하는 결혼제도를 일컬은 말이다. 스므살 서슬 퍼런 젊은 나의 남성관을 바꾼 말이다. ‘돈으로 남자를 평가하지 않겠다.’ 그리고 오히려 나는 더욱 억척 맞게 돈을 벌려고 애썼다. 그러나 결국 돈에 얽혀 사는 나의 모순을 발견하고 얼마나 애통해 했는지. 난 결혼 했다. 남자를 먹여 살려도 좋다고 여기며.

지금 불혹의 나이에 돈과는 상관없이 자원 봉사자로 이번 포름에 참가하게 되었다. 그리고 경제적인 이유로 국제 결혼하여온 여성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가난한 국가, 무능한 남자들, 생활비가 필요한 가족의 설득에 말도 문화도 낮선 이국으로 결혼하여 온 여성의 이야기를 하고 있던 것이다. 그런데 회의 내내 돈이 결부된 결혼, 선수금을 주고 온 결혼의 양상은 결국 매매혼이 아닌가라는 명제아래에 진행이 되어지고 있었다. 게다가 여기에 부로커들이 큰 몫을 차지하니 더더욱 결론은 뚜렷하게 나는듯하다.

결혼이란 개인의 감정의 결단이든, 사회적인 유행이든, 아니며 여러가지 요소이든 하나의 사회적인 구조다, 그 이유가 무엇이든 그 안에서 성의 불평등이 존재하여온 제도다. 부유한 여성이 가난한 남자와 결혼 했더라도, 남성은 차려주는 밥상을 먹으며 사랑 받는다고 여기고, 여성은 칭찬을 받으며 행복하다고 여기는 영상과 끊임없이 마주선다. 이렇게 결혼은 그 자체가 불평등의 구조다. 평등한 결혼은 꿈을 꿀 수 있으나 실현을 위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그리고 그 지겨운 싸움뒤에 갈갈이 찢긴 가슴을 서로 아프게 간직하며 상대방의 이기심에 치사하다 못해 끝내 치를 떤다는 것을. 혹은 성자가 되듯 인생의 고통을 관조하며 흘러가게 되며 그것을 성숙이라고 애써 위로하기도 한다는 것을.

어쩌자고 결혼을 통해서, 그 불평등한 사회적인 모순덩어리 결혼을 통해서 이곳 한국으로 왔는지, 이유가 없어도 두 사람이 함께 산다는 것은 끊임없는 문제로 골머리를 썩는 것인데, 이유가 분명할 때는 오죽하랴. 가정 안에서의 폭력을 공부할 때, 대부분의 폭력 남편은 이야기 한다고 한다. “ 저 여자가 나를 화나게 해서 내가 그녀를 때렸다” “ 저 녀(ㄴ) 이 매를 번다” 폭력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그래도 된다고 생각하는 남성 우위적, 혹은 자신이 가르쳐야 한다는 그 착각의 사고를 어떻게 고칠 수 있을까? 여성을 소유물로 보거나 자신의 성적인 대상으로 익혀오고 느껴온 남성의 사고를 어떻게 하루 아침에 바꿀 수 있을까? 새삼스럽게 돈이 국제 결혼에 더 연류 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참으로 식상한 말이다. 연애는 낭만이지만 결혼은 현실이다. 현실은 돈이며 그것을 떠나서 살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에 매여 병이 나면 어김 없이 폭력성이 드러나게 된다. 그것이 자본주의 생리다.

재미있게도 한국 기조발제자, 한국염 대표는 그의 글의 결론부분에서 매매성 결혼을 줄이기 위해서 이주 여성에게 노동 비자를 더 완화시킬 필요가 있다고 언급하고 있었다. 어떤 이는 이것이 비약이 아니냐고 질문 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결혼 그 자체가 아직은 여성 억압적인 구조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는 내 입장에서 가난한 나라의 여성에게 차라리 자신을 도울 수 있는 일자리를 주는 것이 더욱 솔직한 대답이 아니었나 싶다.

최형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