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가 존중받고 보호받는 선택”이 되도록
<귀환 이주여성을 만나다> 필리핀 이주여성 지원단체를 만나다
* 한국 남성과의 결혼을 통해 한국에 입국했다가 본국으로 되돌아간 <귀환 이주여성을 만나다> 기획 연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아 보도됩니다. 이 기사의 필자 위라겸 님은 전남여성가족재단 연구원입니다.
해외 이주는 인생에서 큰 전환이자, 익숙한 모든 것을 떠나는 선택이므로 그만큼 위험도 도사리고 있다. 이주가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았거나 인권침해를 겪는 등 큰 어려움에 봉착해 다시 자국으로 돌아온 사람들은 정신적, 물질적으로 타격이 클 뿐 아니라, 본국에서 다시 적응해서 살아가야 하는 무거운 과제를 짊어지고 있다.
아시아 각국에서 한국으로 온 이주여성들이 다시 본국으로 돌아간 사례를 추적하던 중에, 우리 조사팀은 필리핀에서 이주여성들을 지원하는 현지 단체들을 만나게 되었다. 필리핀 이주여성들의 실태를 파악하고, 어떤 지원 활동을 하는지 살펴보고, 한국과도 협력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는 시간을 가졌다.
1980년대 이후 증가한 필리핀 여성들의 해외 이주
필리핀 정부는 1970년대 중반부터 노동력 송출 정책, 즉 해외 이주노동자(OFWs, Overseas Filipino Workers)가 보내온 송금을 기반으로 외화를 확보하는 경제전략을 국가 발전 정책으로 채택해왔다. 초창기에는 중동 건설노동자로 많이 이주했는데 남성들이 대부분이었다. 1980년대 들어서는 미국이나 유럽, 또는 일본, 홍콩, 싱가포르 같은 아시아 국가로의 이주가 증가했다.
필리핀 여성들의 해외 이주는 1980년대 이후 증가했는데 가사노동자나 돌봄노동자(보모, 간병인 등)로 이주하는 경우가 많았다. 해외공연예술가(OPAs, Overseas Performing Artists) 지위로 이주했다가, 사기나 강요로 인해 유흥산업으로 유인된 경우도 많았다.
이주노동을 떠난 필리핀 사람들이 해외에서 인권침해를 겪은 사례로는 고용주가 여권이나 외국인등록증을 압수해가서 ‘이동의 자유’를 제한당하는 것, 월급을 제때 제대로 받지 못하는 것, 예술흥행 비자로 입국했다가 성매매나 인신매매 피해를 당하는 것 등 다양했다. 현지 언어와 문화, 제도에 익숙하지 않아서 겪는 어려움도 많았다.
이주를 떠났다가 인권침해를 겪고 필리핀으로 귀환한 여성들은 그 트라우마와 주변의 낙인, 현지 남성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 문제 등으로 힘겨워했다. 게다가 여전히 필리핀에서는 일자리가 없고, 모아놓은 돈도, 기술이나 사업을 시작할 지식도 없어서 사회에 정착하지 못하고 다시 해외로 일하러 떠나기도 했다.
인신매매, 가정폭력 피해를 겪고 ‘돌아온 여성들’
1980년대 후반, 해외에 있는 필리핀 여성노동자와 돌아온 귀환여성들, 그리고 그 자녀들을 지원하는 단체들이 생겨났다. 당시 많은 수가 일본으로 이주했는데, 일본에 간 여성노동자와 결혼이주자 그리고 일본인 남성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들인 자피노(JFC, Japanese-Filipino Children) 이슈를 중점적으로 다루는 NGO들도 생겨났다. 특히 일본에 예술흥행 비자로 갔다가 유흥산업에 유인되어 성매매나 인신매매 피해를 당한 여성들, 또 일본 남성과의 결혼생활에서 가정폭력을 겪거나 아이와 함께 버림받고 필리핀으로 돌아온 여성들을 지원하는 문제가 시급했다.
귀환여성 조사팀이 방문한 <바티스 센터>(Batis Center)는 1980년대 후반에 설립되어 지금까지 일본으로 이주한 경험이 있는 필리핀 여성과 그 자녀들을 지원하고 있는 대표적인 NGO다. 다음은 바티스 센터에서 일하는 활동가 로즈(Rose Otero-Yamanaka)와의 인터뷰다.
-바티스 센터는 해외이주를 한 필리핀 여성들에게 버팀목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센터의 역사에 대해 간략하게 소개해달라.
“바티스 센터는 1989년에 설립되었는데, 필리핀 이주여성을 지원하는 단체로는 최초였다. 출발은 일본으로 이주했다가 강간을 당하거나 폭력 피해를 당한 필리핀 여성들을 지원하는 것이었다. 주로 클럽에서 일하다가 이런 피해를 당하는 여성들이 많았다. 일본에서 노동 착취, 인신매매, 강간이나 폭력, 성적 학대 등을 경험하고 고통 속에 귀환한 여성들과 그 가족들을 지원한다.
1993년에 필리핀 여성이 일본에서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그때 바티스 센터가 지원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해외에서 인권침해를 겪은 여성들이 우리 센터를 찾는 경우가 많아졌다. 여성들이 필리핀에 돌아오자마자 지원을 시작해서 상담, 멘토링, 심리 치료 등 안정적으로 필리핀 사회에 재정착할 수 있게 전 과정을 지원한다.”
-필리핀으로 다시 돌아온 귀환여성들이 바티스 센터를 찾았을 때, 구체적으로 어떤 지원을 받을 수 있는가?
“기본적으로 법률 지원과 의료 지원을 한다. 그리고 지역사회에 안정적으로 재통합되도록 복지 서비스를 연계하여 지원한다. 필요한 경우에는 직업 훈련이나 임파워먼트 프로그램도 제공한다. 함께 귀환한 자녀가 있는 경우 이들을 위한 리더십 트레이닝이나 여름캠프, 상담 및 문화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쉼터도 있지만, 여성들은 대부분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하기 때문에 오랫동안 머물지는 않는다. 집에 가기 전 잠시 마음을 추스르는 정도다.”
-한 해 지원하는 건수는 얼마나 되는지도 궁금하다.
“1989년 설립한 이후 1998년까지 가장 많을 때는 1년에 400건 정도 지원했다. 2005년 필리핀에서 인신매매방지법이 제정되었고, 그 무렵 일본에서도 관련법이 만들어지면서 지원을 요청하는 사람들 수는 많이 줄어들었다. 최근에는 1년에 10건 정도 새로운 지원 요청이 들어오는데, 이건 직접 대면 지원을 하는 사례만 집계한 통계다. 전화나 SNS를 통한 상담은 1년에 100건 정도 하고 있다. 하나의 사례에 대한 지원은 1년 이내에 종료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지만, 사실 그 기간 안에 지원이 끝나지 않는 경우도 많다. 우리는 여성들이 오케이할 때까지 지원을 계속한다.”
“아빠 만나고 싶지?” 인신매매되는 ‘자피노’
<바티스 센터>의 로즈 활동가는 인터뷰를 하던 중에 새로운 문제들이 대두되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바로 필리핀 엄마와 일본인 아빠 사이에 태어난 자피노(Japanese-Filipino Children)들이 인신매매되는 사례가 생기고 있다는 것이다.
-필리핀으로 귀환한 여성과 자녀들 관련하여 새롭게 떠오른 쟁점이나 변화된 상황이 있는지 알려달라.
“예전에는 여성의 인신매매나 성폭력 피해, 그리고 자피노 아동의 ‘유기’와 관련된 사례가 많았다. 그런데 이제는 여성들이 자녀 없이 돌아오는 경우가 더 많다. 하지만 인신매매나 성폭력 관련 이슈는 계속 제기되고 있다.
최근에는 자피노들이 일본에서 태어나서 엄마와 함께 필리핀으로 돌아와 성장하다가, 일본으로 인신매매되는 사례들이 생겨나고 있다. SNS에서 일본식 이름을 사용하고 있으면 ‘일본인 아빠 만나고 싶지? 우리가 도와줄 수 있어.’라는 식으로 접근해서 납치하거나 인신매매하는 경우들이다. 아버지를 한번 만나고 싶어하는 아이들도 있고, 일본인이니까 당연히 부자일 거라고 생각해서 일본에 가보려 하는 아이들도 있는데, 그런 마음을 이용하는 거다.”
-일본 측과 연계하여 여성들과 자녀들을 지원할 수 있는 일본 현지 파트너 단체가 있나?
“일본에 있는 ‘필리핀인 커뮤니티’와 연계되어 있어서 필리핀 여성에게 문제가 발생했을 시 바로 지원할 수 있다. TV와 라디오를 통한 홍보도 하고 있다. 일본 NGO들도 대부분 바티스 센터의 존재에 대해 잘 알고 있어서 여러 방면에서 협력한다. 특히 자피노의 아버지 인지청구 소송이나 양육비 청구 소송 등 다양한 소송 지원을 받고 있다.”
-한국으로 이주했던 필리핀 여성을 지원한 적도 있는지.
“최근 싱가포르나 홍콩, 말레이시아로 이주한 여성들이 지원을 요청하는 사례가 증가하고 있다. 아직 한국 사례는 연계된 적이 없다. 한국에는 바티스 센터가 별로 알려지지 않은 것 같다. 한국에서 연계를 요청해온다면 우리는 적극 협조할 것이다.”
‘이주’도 ‘귀환’도 선택이 될 수 있어야 한다
해외이주와 귀환은 필리핀 사회에서 그리 특별한 현상이 아니다. 귀환여성 조사팀이 방문한 필리핀의 지원단체들은 여성들의 이주와 귀환이 ‘할 수밖에 없는’, ‘고통스럽지만 어쩔 수 없는’ 경험이 아니라, 개개인의 삶에서 다양한 선택지 가운데 하나가 될 수 있도록 이들을 지원하고 있었다.
여성과 아이들을 지원하는 것뿐 아니라, 한편으로는 사회와 제도를 바꾸기 위해 활동하고 있다. 특히 여성들이 이주해간 나라에 있는 필리핀인 커뮤니티나 필리핀 단체, 또는 현지의 NGO들과 연계하여 필리핀 여성들이 귀환하기 전부터 귀환 이후 정착까지 다양한 차원에서, 다양한 자원을 끌어모아 지원하고 있는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귀환한 필리핀 이주여성들과 아이들 문제에 대응하는 단체 <여성네트워크발전행동>(DAWN, Development Action for Women Network)의 경우도 법률, 의료 지원과 상담, 치유 워크숍을 비롯해 가족과 지역사회에 안착할 수 있도록 다양한 지원활동을 펴고 있었다.
‘여성네트워크발전행동’(DAWN) 활동가 셰인(Shane Ann M. Mesa)은 특히 “귀환여성들이 안정적으로 필리핀에 재통합, 재정착하는 데에는 경제적 자립이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래서 DAWN에서는 기술 교육을 하고, 구멍가게처럼 집에서도 간단히 시작할 수 있는 사업을 안내하며 창업 세미나도 하고 있다. 이주여성 역량강화 프로그램인 Sikhay(SIKAP BUHAY) 현장도 안내를 받았다. 사무실 안에 교육장을 만들고 여성들에게 재봉과 직조 기술을 교육하고 있었다. 옷이나 가방, 식탁보 등을 생산하는데, 이 과정은 여성들이 심리적으로 치유되는 계기가 되기도 하며, 한편으로 이렇게 생산된 물품을 판매하면서 귀환여성들이 겪는 어려움을 대중에게 알리는 역할도 한다.
‘여성네트워크발전행동’(DAWN) 역시 귀환여성들과 자녀들의 권리와 복지를 위해 각 지역의 학교와 교회, 정부기구와 비정부기구, 시민사회그룹 등 다양한 조직들과 연대하고 있으며 국외 단체들과도 협력하고 있었다.
셰인 활동가는 일본에서 태어났지만 필리핀에 와서 살면서, 일본인 아버지와 떨어져서 성장하며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자피노’ 아이들을 위한 활동도 소개했다.
“매년 자피노가 일본에 방문하여 현지 학생, 지역민들과 교류하는 프로그램(Theatre Akebono for JFC)을 실시하고 있다. 자피노가 직접 뮤지컬을 공연하고, 일본 현지인들과 소통하는 워크숍도 개최한다. 일본인 아버지와 만남이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다. 일본에 DAWN-JAPAN과 DAWN KUIS 같은 우리 단체 후원그룹이 조직되어 있어서, 이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를 비롯하여 국내 이주여성 지원단체들은 아시아 각국의 귀환여성들을 지원하기 위한 활동을 기획하고 있다. 이번 만남을 통해 필리핀 단체들을 벤치마킹하고, 또 이들과 연계를 맺을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한국의 NGO와 한국 내 이주민 커뮤니티, 이주자들의 본국 NGO 등이 촘촘한 네트워크를 만들어서 여성들의 귀환 과정 하나하나를 지원할 수 있다면, 정말 ‘강요된 귀환’이 아닌 ‘선택한 귀환’을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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