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그것에서 나와 너의 관계로!
                                
                                                                                 한국염

  인간은 하나의 대상에 마음을 주고 그 대상 속에 침착하다 보면 그 대상이 될 수 있다고 한다. 우리가 아는 나다나엘 호오돈의 ‘큰 바위 얼굴’이야기도 같은 맥락의 이야기다. 

 어느 마을의 산허리에 큰 바위얼굴이 있었다. 그 마을에는 언제가 때가 되면 그 큰 바위 얼굴을 닮은 위대한 사람이 나타날 것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졌고, 사람들은 그 바위를 보면서 그 위대한 사람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어네스트라는 소년 역시 매일 큰 바위얼굴을 보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큰 인물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소년 어네스트는 자라서 어른이 되었고, 마을 사람들에게 인생의 스승으로서 덕을 풍기며 살았다. 그는 여전히 큰 바위 얼굴을 보면서 대화를 나누며 살았다. 

 그 마을에 한 유명한 시인이 휴양 차 그 마을을 찾아와서 머무르게 되었다. 그 시인은 어네스트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느날 산허리에 해가 질 무렵 시인은 큰 바위 얼굴 앞에서 마을 사람들에게 삶의 지혜를 가르쳐 주고 있는 어네스트의 모습을 보면서 외쳤다. 큰 바위 얼굴이다! 어네스트는 큰 바위얼굴과  교감을 나누면서 드디어 큰 바위 얼굴을 닮아 간 것이다.

이 이야기처럼 아무리 무생물처럼 보이는 바위 덩어리라 하더라도 끊임없이 그 대상과 교감을 이루다 보면 동화작용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처음 우리가 한 대상을 정했을 때 그 대상은 관찰의 대상에 불과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더 이상 나와 그것의 관계가 아니라 나와 너의 관계가 되고 나아가 나와 네가 하나가 된다고 한다.

마틴 부버는 “나와 너”라는 책에서 나무를 통해 이 관계를 잘 설명하고 있다. 처음에는 나무를 형상으로 받아들여 관찰하면서  물체로 파악하여 그것의 구조나 생존양식을 관찰한다. 그러나 그 나무를 관찰하면서 그 나무와의 관계에 끌려 들어가는 일이 일어날 수가 있는데, 그렇게 되면 나무는 더 이상 나에게 그것이라는  대상이 아니라 나와 마주보고 서서 관계를 맺고 있는, 살아있는 나무자체를 만나게 되고 그 나무와 나는 ‘나와 너’의 관계가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는 더 이상 너도 아니고 바로 내가 되는데, 이것은 은총에 의해 일어날 수가 있다고 한다.
 
 사랑의 교감을 나누다 보면  서로 기가 어우러져 둘이 닮아간다. 오랜 세월을 같이 진실된 관계로 산 부부가 전혀 핏줄이 달라도 닮는 것은 서로 교감을 나누고 일체감을 이루기 때문이다. 서로 교감을 나누고 닮아야 할 대상이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들이다.  그런 대상이 있는지 한번 곰씹어 보면 좋을 것 같다.  
  
  어느덧 우리 사회는 외국인 1% 시대를 넘어서고 있고, 15개국 이상의 아시아 여성들이 노동자로,   23 이상의 나라 여성들이 국제결혼으로 한국에 들어와 살고 있다. 이미 다인종, 다민족 사회에 들어섰다. 이런 지구촌 시대에 우리는 이주민과 교감을 나누고 일체감을 가질 수 없는 가?  이주여성과 우리가  외국인과 한국인이라는 경계를 넘어서 차이를 차별이 아니라 개성으로 존중하여 서로 교감을 나누고, “나와 그것‘이 아니라 ‘나와 너“로 만난다면, 그때 우리는 비로소 획일성이 아니라 다양성이 축복임을 알게 되고 진정한 다민족 공생사회를 이루게 될 것이다.      

*이 글은 2007년 8월 11일 국민일보 지혜의 아침란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