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을 하면 각양각색 삶의 모습을 지닌 여성들을 만나게 된다. 그런데 상담을 청하는 여성들 중에는 가끔 의외의 인물(?)이 있다. 한국어교실에서 보이는 모습이나 그녀의 평소 삶의 모습들을 봐서는 그냥 잘 살고 있겠거니 했는데 의외로 곪은 마음을 내보인다. 그리고 이런 경우에는 그 상처가 곪아 훨씬 깊고 심각할 때가 많다. 얼마 전에 상담한 한 여성도 그러했다.
한국으로 결혼해서 온지 5년, 그녀는 한국말도 무척 잘했고 통역에도 능숙했으며 자신의 일에 대한 자부심도 넘쳤다. 시아버지와 치매에 걸린 시할머니를 모시고 남편과 살면서, 한국어도 누구보다 열심히 배웠고 상담원, 통역원 등의 일을 하며 사회활동도 활발히 하였다. 그녀가 사는 지역사회에서는 아주 모범적이고 성실한 결혼이주여성으로 소문이 나서 언론매체에 소개되었고 지역에서 다문화 가정을 연구하거나 돕는 연구자들에게도 여러 차례 모범 사례로 소개되었다. 또한 본국 출신의 어려운 일을 겪는 사람들에게도 알려져 그녀에게 도움을 청하면 적절한 도움을 주는 그야말로 슈퍼우먼이었다.
그런 그녀가 상담소를 찾아온 이유는 도저히 더 이상 남편과 살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남편의 불같은 성격, 폭력과 툭하면 집에서 나가라는 남편의 모욕적인 언사, 아무리 시아버지 시할머니에게 잘해도 언제나 자기를 무시하는 시집식구들의 태도로 자신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다고 했다. 그녀는 어릴때부터 어려운 집안형편 때문에 고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학교에 다녔고 대학교 1학년 재학중에 친정 식구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국제결혼을 택했다. 한국에 와서 잘 살고 싶었고 한국에서 잘 살면 고향 식구들도 도울 수 있고 자신도 성공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에서 그녀는 말 그대로 죽을 힘을 다해 노력했다. 칭찬받고 인정받고 정착하기 위해서. 그래서 한국 사람도 잘 모시지 않는 치매 걸린 시할머니도 정성껏 모셨고, 한국어도 열심히 배웠고 행복한 부부로 살려고 노력했고, 아무리 힘들어도 다른 사람들한테도 고향에도 힘든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본인 스스로 난 행복하다, 난 잘 살고 있다는 암시를 하며 여지껏 지내왔다.
하지만 마음에 쌓인 스트레스는 그녀를 상하게 했다. 점점 남편과의 다툼이 잦아졌고 그러면서 본인 스스로가 화가 나고 남편과 다툴 때면 자신을 제어할 수 없게 되고 무슨 말이 오갔는지 어떤 행동이 오갔는지 조차도 기억할 수 없을만큼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게 되었다. 이러다가 내가 미치는게 아닐까 하는 두려움, 이렇게 내 삶을 포장해서 살아본들 내 인생은 정말 행복한걸까 하는 회의감, 점점 더 커져가는 주변사람들의 자신에게 가지는 기대에 대한 부담감 등 이제 더 이상 자신은 이런 것들을 떠 안고 살아갈 기운이 없다며 남편도 싫고 한국 사람도 싫고 한국도 싫다며 울었다. 정말 하염없이 눈물을 쏟아내며 누구에게도 이런 말을 할 수도 없었고, 이제껏 울고 싶어도 한번도 맘 놓고 우는 것 조차 할 수 없었다 한다.
한국사회가 이주여성을 그리는 두 가지 이미지가 있다. 한 가지는 피해자로서의 이주여성이다. 남편에게 폭력 당한, 남편에게 쫓겨나 갈 곳 없는, 어려운 생활 속에서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만 하는 결코 주체적일 수 없는 동정심을 유발하는 모습이다. 다른 한 가지는 한국사회에 잘 적응하여 좋은 아내로, 착한 며느리로 그렇게 정착해가는 모습이다. 그 속에서 그녀들이 얼마나 치열하게 얼마나 아프게 자신을 추스르며 혼신의 힘을 다하려고 애쓰고 있는지 그 마음을 읽어주는 노력은 소홀히 한 채, 그저 그렇게 보여지는 여성들의 표면적인 모습에만 한국은 환호를 보내고 마치 그 삶이 롤 모델인양 박수를 쳐 주며 수많은 이주여성들은 그런 모습으로 살아야지만 한국에서 인정받고 사랑받을 수 있다는 암시를 건다.
사람이 살아가는 삶의 모습은 너무나 다양하고 각양각색이다. 이주여성의 삶 역시 마찬가지이다. 자기만의 삶의 결을 가지고 자기만의 삶의 길을 걸어갈 권리가 그녀들에게 있다. 그러나 한국은 저 두가지 프레임에서만 이주여성을 바라보려 하면서, 후자의 삶을 그녀들에게 모범답안처럼 제시한다. 그래서 여성들은 그 답안을 쫓아가려고 안간힘을 쓰게 된다. 자신의 마음이 어떠한지, 정말로 자신의 삶은 어떠한지, 자신은 어떤 길 위에 서 있는지를 돌아볼 여유도 마음도 허락받지 못한채… 후자의 프레임 속에 들어가지 못하면 나는 실패한 인생이 될거라는, 한국사회에서 인정받는 또는 환영받는 사람이 되지 못하리라는 두려움 속에 자신이 원하는 삶이 동그라미인지 세모인지 생각지 못한 채 네모의 삶 속에 억지로 맞춰 넣는 삶을 살게 된다. 그것이 자신을 병들게 하는지, 행복하게 하는지를 가늠하지 못한 채. 그렇기에 사실 한국사회가 이제 그녀들을 향해 하는 역할은 어쩌면 우리의 잣대로 그녀들을 돕는 것이 아니라 그녀들을 자유롭게 해 주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와 상담을 하며 한참 울던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처음엔 한국사람들이 잘 산다고 칭찬해주고 인정해 주어서 좋았어요. 그래서 더 노력했어요. 하지만 어려움이 생기니까 말할 곳이 없었어요.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내가 너무 잘 사는 줄 알고 있으니까…실망시킬 수 없었고 탄로나는게 두려웠어요. 하지만 이젠 너무 지쳤어요. 더 이상 버틸 기운이 없어요…엄마가 실망하겠지만…엄마가 오라고 했어요. 엄마한테 가고 싶어요” 라고.
사실, 그런 그녀에게 난 별로 해 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그녀의 떨리던 두 손을 꼭 잡아 주는 일 말고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