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도 덜도 말고 이들만 같아라!
                                                

지난 5월 4일부터 9일 동안 독일에 다녀왔습니다. 독일에 있는 한인교회 여신도회 연합회 창립 25주년 기념 세미나에 강사로 초빙을 받아 참석했던 거지요. 이 총회에 참석한 이들은 대개가 60-70년대에 독일에 간호원으로 갔던 이주여성노동자들이었습니다. 소위 우리나라가 제3세계로 불리던 시절, 그때 나라와 집안의 가난 때문에 이역만리 독일로 이주노동을 떠났던 이들입니다. 이 파독간호원들 가운데 교회에 다니는 여성들이 모여 여신도회를 조직했고, 이 여신도회는 타국에서 외롭고 어려운 문제에 부딪친 여성들의 문제를 발굴하고 과제를 모색하는 구심점 역할을 했습니다. 독일교회와의 연대도 일구어 이들 간호원들이 독일사회에 끼친 공헌과 역할을 알리는 일도 했고, 그 결과 고국에 돌아올 사정이 못되는 이들이 독일에 남아있을 수 있는 길도 모색을 했습니다. 한국의 암울하던 독재시절 한국의 인권상황을 독일교회에 알리는 한편, 헌금을 모아 구속자영치금과 인권운동을 위한 지원금으로 보내고 구속자 석방을 위한 캠페인이나 독일에 피신한 민주인사들과 통일인사들을 지원하는 둥 분단된 조국의 통일운동에 참여했습니다. 물론 넉넉해서는 아니었지만 고국을 위해 무엇인가 하려는 마음에서였지요.

아무튼 이제 모임의 창립 25주년을 맞는 이들은 한국을 떠난지 어연간 30년이 지나 머리칼이 희끗해지고 얼굴에 주름살도 늘었습니다. 이주여성운동을 하는 목사로서 그들 앞에 서니 남다른 느낌이 들었습니다. 두개의 여성신학에 관한 강의를 하고 나서 한국의 이주여성에 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내가 왜 이주여성문제에 뛰어들게 되었는지, 이주여성들의 실정이 어떠한지, 이주여성들이 당하는 고난이 어떠한지 등, 특히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 없는 이주여성노동자들이 당하는 아픔을 이야기할 때는 눈물을 글썽이었습니다. 남의 이야기가 아니었던 거지요. 그들도 그랬습니다. 열심히 일해 번 돈을 집에 부치면 집에서는 그 돈을 오빠나 동생들의 학비로 쓰고, 텔레비전을 사고 집을 짓고 땅을 샀습니다. 처음 계약기간이 끝나고 다행히 독일정부에서 3년을 더 연장해주자 너무 부모 형제가 보고 싶어 휴가를 내어 고국 집을 방문했습니다. 막상 나와 보니 자기가 번 돈은 모아놓은 것이 없고 여전히 돈이 필요했습니다. 오랫동안 헤어졌던 식구들이 만나는 감격도 잠시, 자기의 도움을 받은 손 위 형제들은 이미 결혼해서 학비 도움 받은 것을 갚으라 하지 않을까 내심 불안해하는 눈치였고, 동생들은 아직도 학비를 더 보내야 했습니다. 부모님들도 직접 말은 안하지만 딸이 다시 나가서 일을 해서 돈을 더 보내주었으면 하는 눈치였습니다. 그래서 다시 한국을 떠나 독일로 돌아올 때 가슴 저 밑바닥에 허탈감이 쌓이는 것을 어쩔 수 없었지요. 처음 한국을 떠날 때는 그야말로 독일 꿈을 안고 희망에 차 떠났는데, 이제 두 번째 떠날 때는 그 고국이 더 이상 자기가 발붙일 곳이 아니라는 체념을 하며 비행기를 타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물론 한국으로 돌아가고자 이를 악물고 그곳에서 돈을 모아 귀국한 사람들도 있지요. 이렇게 해서 독일에 머물게 된 파독 간호원들, 이들이 보낸 돈을 기반으로 조국은 근대화를 했고 이제는 제삼세계라는 소리를 더 이상 듣지 않는 나라가 되었지만, 이제 한국은 이들이 발붙이며 살 곳이 아니라 가끔 방문하는 나라가 되었지요. 부모님이 살아계신 동안은.

이들이 지금 한국에 제3세계 여성들이 자기들처럼 고국을 떠나 이주노동을 하러 온다는 사실, 그 여성들의 삶의 이야기를 들으며 30년 전 자신들의 모습이 되살아났겠지요. 저 역시 이들의 모습을 보며 감회가 깊었습니다. 물론 이들의 처지와 한국에 오는 이주여성들과 단순 비교를 할 수 없지요. 질적으로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인종차별과 문화가 다른데서 오는 이질감과 소외감 등은 있었지만, 이들은 기본적인 인간 대접은 받았다고 합니다. 독일에서 일자리로 투입되기 전에 국가 지원 하에 기초 독일어 교육을 받았고, 독일인과 같은 직장에서 일할 경우 임금도 같았고 휴가도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광주사태가 생겼을 때 이런 위험한 지경에 놓인 나라에 이들을 무작정 돌려보낸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교회와 지식인들이 나서서 정부로 하여금 특별체류허가를 내주도록 했습니다. 이 시점을 기준으로 이들 중에는 파독 광부들과 결혼을 하거나 교회나 직장에서 만난 독일인들과 결혼을 하는 사람이 생깁니다. 독일인과 국제결혼을 한 사람들을 한독부부라고 하는데, 우리나라에서 일어나는 국제결혼과 달리 사랑에 의한 결혼이니 입장이 매우 달랐지요. 같은 한국인과 결혼한 이들보다 경제적으로 우위에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고요.

안타깝게도 최근에는 독일 국제결혼도 우리나라와 비슷한 양상이 일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농촌의 남성들이 동독이나 동구권의 여성들과 결혼을 해서 학대하는 일이 사회적 문제가 되기 시작하고 있다고 합니다. 가난한 나라의 여성들이 상품화되고 인권착취에 고통당하는 일이 언제나 없어질런지요?
아무튼 그분들에게 한국 이주여성들의 실상을 이야기 하면서 이런 말로 결론을 맺었습니다. “더도 덜도 말고 한국에 온 이주여성들이 여러분만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분들은 이구동성으로 “아멘” 하고 응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는 말이지요.

고국이 가난하여 독일에 이주 노동을 하러 떠났던 파독간호원들, 젊은 시절 와서 은발이 되어가는 이들을 보며 한국에 온 이주여성을 위해 빌어봅니다. 우리나라에 온 이주여성들이 이 땅에서 기본적인 인권을 누리며 살다가 자기 나라로 돌아가기를! 머무를 수밖에 없는 이들은 강제로 추방당하지 않고 원하는 곳에서 살 수 있기를! 자기 나라 공동체를 꾸려 정체성을 유지하며 외로움을 덜고 문제가 생기면 그 공동체를 통하여 공동으로 대처하고 그들의 고국을 위해서 무엇인가 할 수 있기를! 그리고 세월이 지나 이 땅에서의 지난 삶을 감사하는 축제를 갖는 그런 날이 오기를 그려봅니다. 또한 한독부부들처럼 이주노동을 하러 온 여성들이 사랑으로 한국인과 결혼을 하고 아기 낳고 한국에서 오순도순 뿌리내리는 날을 그려봅니다. 지나간 삶이 비록 힘들었지만 아름다운 인생의 밑거름이 되는 추억으로 말할 수 있는 그런 날이 오기를 그려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