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천의 스리랑카 미등록 이주여성 이야기

 

허오영숙/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 조직팀장        

 

1) 닐라니와 자나 이야기

 

자나와 닐라니는 시누이올케 사이다. 포천의 양계장 옆 컨터이너 건물에 같이 산다.

양계장 특유의 닭똥 냄새는 컨터이너 안에서도 어쩔 수 없다. 방 2개, 거실과 주방, 욕실로 이루어진 컨터이너 안은 꽤 넓었다. 그러나 집 같은 안온함이 덜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방 하나에는 닐라니가 남편과 세 명의 아이와 지내고, 다른 방에는 자나가 쌍둥이 아이와 지낸다. 자나의 남편은 2년 전에 단속 당해서 강제추방 되었다.


일요일임에도 일을 하는 자나를 기다리며, 닐라니를 먼저 만났다. 아니, 그녀의 남편을 만났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 닐라니는 방문한 우리를 위해 다과를 준비하느라, 아이들을 건사하느라 정작 인터뷰에 거의 참여할 수 없었다. 2004년에 한국에 와서 햇수로 6년이 되었지만 간단한 한국어 밖에 못하는 그녀를 대신하여 남편이 거의 대부분의 대답을 하였다. 그것은 언어의 문제보다 남편이 아내를 대변하는 그들 부부의 평소 모습 같았다.


닐라니는 2004년에 4년 체류할 수 있는 종교 비자로 한국에 왔다. 먼저 한국에 들어와 있던 남편과 결혼하기 위해서였다. 홀로 10년 넘게 한국에서 일하는 아들의 혼사를 위해 시아버지가 그녀를 데리고 한국에 왔고, 1년 뒤인 2005년에 그들은 정식으로 결혼했다. 결혼한 첫해 큰 아이가 태어나고, 연년생으로 둘째를 낳고, 셋째는 2008년에 태어났다. 지금 뱃속에 넷째 아이가 자라고 있다. 그녀의 비자는 2008년에 끝났다. 연장하려면 스리랑카에 다녀와야 했지만 셋째를 낳은 직후여서 비행기를 탈 수 없었다. 그렇게 그녀는 “불법”이 되었다.


한국에 온 뒤 그녀는 일요일에는 교회를 가고, 평일에는 양계장에서 아르바이트로 일을 했지만 연달아 태어나는 아이들 때문에 살림과 육아에 매달려야 했다. 그러느라 한국어를 배울 수 있는 이주민 센터 같은 곳에 나가 본적이 없다. 아니, 외출을 제대로 할 정신도 없었다. 한국 체류 6년인 지금도 간단한 의사소통도 어려운 이유이다. 2년 전부터 남편의 여동생이 같이 살게 되면서, 시누이의 쌍둥이 아이까지, 도합 5명의 말썽꾸러기들을 돌봐야 한다.


그녀의 남편은 1994년에 산업연수생으로 입국했으나 3개월만에 공장을 나왔다. 8, 9만원의 월급으로는 견딜 수 없었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16년 동안 미등록 상태이다. 1971년생인 그가 한국에 처음 왔을 때 스물 세 살의 풋풋한 젊은이였는데 이제 곧 마흔의 중년, 네 아이의 아빠가 된다.


닐라니의 시누이, 자나는 2000년에 한국에 와서 벌써 한국 체류 10년이다. 자나의 남편은 그녀보다 빠른 1994년에 입국했다. 남편이 한국에 오기 전에 이미 스리랑카에서 결혼을 했던 그들은 6년을 떨어져 지내다 자나가 2000년에 입국하면서 함께 살게 되었다. 그녀는 3개월 체류 가능한 비즈니스 비자로 입국했는데, 그것은 입국하기 위해 만든 비자였을 뿐 사업을 할 생각은 없었다. 그렇게 재회한 부부 사이에 쌍둥이가 태어났고, 이제 쌍둥이는 네 살이 되었다.


2년 전 남편은 우습게 추방되었다. 오토바이를 몰고 가다가 교통경찰의 검문에 걸려 면허증이 있네, 없네 하다가 미등록인 게 드러나 외국인보호소로 잡혀 갔다. 그리곤 강제출국. 남편이 추방당한 뒤로 오빠네와 살림을 합쳤다. 그녀의 쌍둥이는 올케인 닐라니가 봐 주고, 오빠와 자나가 한 양계장에서 일해서 두 사람 몫으로 월급 220만원을 받는다. 그 중에서 130만원은 오빠 몫이고, 그녀의 몫은 90만원이다. 희한하게도 양계장은 두 사람 월급을 따로 주지 않고 묶어서 준다. 부부가 일하면 같이 180만원 이런 식이다.


이들 가족의 가장 큰 문제는 모두가 ‘불법’이란 사실이다. 통역을 도와준 포천 이주민센터의 자나카님과 이들 가족이 스리랑카어로 말하는 동안에도 그들은 ‘불법’이라는 한국말을 섞어 썼다. 미등록 이주민 사이에, 국적과 언어를 불문하고 ‘불법’은 고유 명사가 된 모양이다.


닐라니가 넷째를 임신 중이기 때문에 검진을 위해 병원을 드나들 때 그들은 대절 택시를 불러야 한다. 그래서 병원비보다 택시비가 더 나온다. 슈퍼를 마음 놓고 갈 수도 없고, 다섯이나 되는 말썽꾸러기들을 밖에서 놀게 할 수도 없다. 언제 단속을 당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나마 공장이 아니라 양계장에서 일하고, 살기 때문에 단속의 위험이 덜한 편이다. 이주노동자가 많은 공장은 단속이 뜰 가능성이 높지만, 개별로 흩어져 있는 양계장은 일일이 단속할 위험이 적기 때문이다. 아직까지 개별 양계장까지 단속했다는 소식은 없다. 그래도 마음을 놓을 수는 없다.


이런 미등록 이주민의 ‘외출 할 수 없는 상태’를 이용한 영업도 성행 중이다. 인터뷰를 하는 도중에 인도 사람들이라는 ‘방물 장수’가 방문했다. 그들은 각각 떨어져 있는 양계장 등의 미등록 이주민들을 찾아 다니며 필요한 물건을 주문받고 대신 사다준다. 직접 집에까지 배달해 주기 때문에 당연히 슈퍼에서 가서 사는 것 보다 훨씬 비싸다. 그래도 이들 ‘방물 장수’ 때문에 꼭 필요한 물건을 정기적으로 구입할 수 있다.


자나도 닐라니도 스리랑카에 전혀 송금을 하지 못하고 있다. 아이들과 함께 생활을 꾸려가기도 빠듯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지금 스리랑카에 돌아갈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스리랑카에서 직업을 구하기도 어렵고 아이들을 교육시킬 가능성도 낮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한국에서 교육 받아 한국어를 잘하고, 태권도라도 익히면, 스리랑카에서 태권도 사범을 할 수도 있을 테고, 한국어 능력으로 무역회사에서 일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스리랑카로 그냥 돌아가면 그런 희망도 사라질 것만 같다. 2년 전에 추방당한 자나의 남편은 아직도 스리랑카에서 일을 구하지 못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그럼에도 자나는 남편 곁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한다. 아이들이 커 나가는데, 아빠없이 아이를 키우는 것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 들기 때문이다.


 

2) 차미 이야기


 

포천의 또 다른 양계장으로 차미 가족을 만나러 갔다. 들판에 드문드문 있는 양계장들은 고립될 수밖에 없는 미등록 이주민들의 상황을 대변해 주는 것 같다. 차미의 집도 양계장 한쪽의 컨테이너이다. 닭똥 냄새와 들끓는 파리들을 뚫고 그녀의 집으로 갔다.


차미의 집은 닐라니의 집보다 좁고 낡았다. 그 집에는 차미와 남편, 어린 아들이 함께 산다. 그들은 스리랑카에 아이 두 명을 두고 한국에 왔다. 스리랑카의 큰 아이가 벌써 열일곱살이다.


차미의 남편이 먼저 한국에 오고, 3년 뒤인 2002년에 차미가 입국했다. 셋째 다섯 살 배기는 한국에 와서 낳았다. 그녀도, 남편도 한국에 입국할 때는 3개월 체류 가능한 비즈니스 비자로 왔다. 합법적으로 입국할 수 있는 비즈니스 비자를 만들어 주는 브로커에게 한 사람당 500만원 이상을 주었다.


차미가 처음 입국 했을 때는 남편과 함께 회사 공장에서 일했다. 지금의 양계장으로 옮긴지는 3년 정도 되었다. 양계장이 월급이 더 적지만, 아직 어린 아이를 양육하는데 편리한 점 때문에 옮겼다. 아이가 아파 병원에 가야 할 때, 아침에 어린이 집에 보낼 때, 남편과 시간을 조절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에 남편만 일을 못하게 되었다. 양계장이 어려워지면서 차미만 월급을 받게 된 것이다. 그녀의 월급은 80만원. 그래서 그녀는 부업을 한다. 음식 솜씨가 좋은 그녀가 스리랑카 음식을 만들면, 남편이 배달을 한다. 이미 그녀의 음식 솜씨가 알려져서 고국 음식이 그리운 주변 스리랑카 친구들이 주문을 한다. 그래서 인터뷰하러 찾아간 그 순간에도 가스렌지 위에는 큰 들통이 끓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버는 부수입은 4, 50만원 정도이다. 음식 부업을 포함하여 120, 130만원 정도인 그녀의 수입에서 월 40만원 정도를 송금한다. 송금 수수료 때문에 몇 달에 한번씩 부친다. 스리랑카에 있는 아이 둘의 양육과 그 아이들을 봐주는 부모님이 생활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녀의 큰 아이는 1년 동안 한국에 왔었다. 처음에는 관광비자로 왔다가 아는 목사님이 주선해 주어 한국 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그러나 1년 뒤에 아이의 비자는 연장되지 않았다. 열일곱 살짜리 아이를 ‘불법’으로 만드는 게 걸려서 비자 끝내기 전에 돌려보냈다. 그러나 둘째 아이는 한국에 온 적이 없다. 그녀가 둘째를 못 본지 8년이고, 막내는 둘째 형의 얼굴을 본 적이 없다.


최근에 단속이 심해지면서 그녀 가족은 계속 불안하다. 최근에 그녀의 고국 음식 고객이었던 주변의 스리랑카 친구들 세 명이 단속당했다. 그런데, 그 친구들은 한국에 온 지 몇 개월 되지 않은 사람들이다. 한국에 올 때 적어도 브로커에게 4, 500만원은 들여서 왔는데, 그 돈을 전혀 갚지도 못하고 잡혀갔다. 4, 500만원이면 스리랑카에서 엄청 큰 돈인데, 그 돈을 다 빌려서 왔을 턴데, 그렇게 단속당하면 너무 절망적이다. 그 뒤부터 그녀 부부는 더 불안하다. 양계장 밖에서 차 소리만 들어도 일단 숨는다. 출입국 사무소의 단속이 아닌지 확인된 다음에야 밖으로 나온다.


‘불법’인 게 잘못이라고 생각은 하지만, ‘불법’이라고 해서 나쁜 일을 한 적도, 안 좋은 일 한 적도, 다른 사람 괴롭힌 적도 없는데 무조건 잡아가고 추방하는 게 속상하다. 더구나 올 6월부터 미등록 이주자가 단속되면 미등록 기간 동안 1년에 50만원씩의 벌금을 물리겠다고 하여 모두가 걱정하는 중이다. 그 벌금을 적용한다면, 차미는 8년 있었으니 400만원, 남편은 10년이니 500만원, 둘이 합쳐 900만원을 내고 강제추방 당해야 한다. 단속되면 그냥 스리랑카로 돌아갈 생각이지만, 벌금은 없었으면 좋겠다. 한국에서 고생해서 겨우 모은 돈을 벌금으로 다 내고 돌아갈 수는 없지 않는가?

 

 

 

* 이주여성의 이름은 신분보호를 위해 가명 처리하였다.

 

* 이 글은 필자가 ‘국내 체류 미등록 아시아 이주민들의 시민권리 강화와 사회연대 전략’ 을 주제로 이주 관련 여성 활동가들과 함께 ‘2010 아시아인들의 Folk & Talk 프로젝트팀’으로 활동하며 진행한 ‘한국에 살고 있는 미등록 이주여성 이야기’ 중 일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