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여성 란의 죽음을 애도하며 근본적인 대책 마련을 촉구한다.
한국염
지난 2월 6일 경북 경산에 살고 있는 22상의 베트남 여성 트완 탄 란이 살고 있던 고층아파트 베란다에서 뛰어내려 죽었다. 란은 작년 9월 결혼해서 올해 1월 중순에 한국에 들어왔는데 설 을 하루 앞둔 전 날에 죽었다. 란의 죽음은 작년도 후인 마이 사건과 더불어 베트남 사회에 떠 한 번의 파문을 몰고 왔고, 주한 베트남대사관 측이 경산 현장을 찾아 사고 경위 조사에 나서가도 했다.
겉으로 보기에 시신에 별 다른 외상에 없었고, 란이 결혼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해 이혼한 후 귀국시키려 비행기 표까지 끊어주었다는 남편의 말에 따라 적응을 힘들어 하던 란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추정되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석연치 않은 것은 란의 남편은 통역을 통해 가족과 협의해 시신을 화장해서 위로금까지 보냈다는 하는데, 그 어머니는 딸이 자살한 원인을 알고 싶다, 또 화장한 시신이 정말 딸의 것인지, 왜 그렇게 빨리 화장을 했는지에 대해 의혹을 제기하고 베트남에서 딸의 장례식을 미룬 채 이 사태에 대한 정확한 규명을 요구했다. 이런 소식을 접하면서 베트남에서는 두 나라 정부가 ‘베트남 신부 보호 방안’을 마련할 것을 촉구하고 있는데, 이런 베트남 측의 요구가 아니더라도 우리 정부에서 란의 자살사건 진상규명과 더불어 국제결혼 이주여성을 보호할 수 있는 장치를 근본적으로 모색해야 한다.
한국에 들어온 지 한 달밖에 되지 않는 란의 자살에 대한 책임은 누가 져야 할까? 누가 이 여성을 죽음의 길로 내몰았는가? 란의 자살은 자살이 아니라 자살을 할 수밖에 없게 하는 ‘빈곤의 여성화’에 따른, 한국과 국제결혼 이주여성의 고향 나라에 의한 타살로 볼 수밖에 없다.
경산의 란의 죽음을 접하면서 몇 년 전에 우리 쉼터에 머물렀다가 베트남으로 돌아간 또 하나의 란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란은 18살이었는데 엄마에게 떠밀려 대구에 시집온 지 한 달 만에 죽으려고 손목을 그었다. 다행히 살아나 우리 쉼터로 오게 되었는데 그때 그 여성의 말을 들으며, 아, 이 여성이 24시간 창살 없는 감옥에 있는 그런 망막한 느낌,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절망감으로 지내왔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대구의 란은 우리 쉼터에 있다가 독지가의 후원으로 베트남으로 돌아갔다. 고향에 가면 마을 사람들이 결혼에 실패해서 온 여자라고 좋지 않게 생각하기 때문에 엄마가 있는 고향으로 가지 못하고 공장에서 일을 하고 있는 오빠를 찾아 호치민으로 돌아갔다. 경산의 란 역시 대구의 란이 겪었던 그 심정이었을 것 같다. 말 한마디 통하지 않는 곳에서 낯 선 이들과 지낸다는 것은 일종의 고문과도 같았을 것인데, 어떤 이들은 그런 것도 생각하지 못하고 한국에 시집왔느냐고 하겠지만, 그게 어디 생각처럼 쉬운 일인가?
작년에 베트남에 가서 국제 결혼해 한국에 왔다가 한국에서 살기를 포기하고 귀환한 여성들을 만난 적이 있다. 이 여성들이 이구동성으로 한 말은 자기 주위에서 국제결혼으로 한국에 가겠다고 하는 여성들을 만나면 “다시 한 번 더 생각해 보라.”고 충고하고 싶다고 말했다. 충격적인 것은 그들 모두가 ‘자살’을 생각했었다는 것이다.
현재같이 영리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한국국제결혼중개업자와 현지 브로커의 주선에 의해 이루어지는 국제결혼 시스템은 근본적으로 문제를 안고 있다. 여성이 존엄한 존재라기 보다는 상품처럼 인식되고, 남편 될 사람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것도 없이 비용을 댄 남편의 일방적인 선택을 받아 결혼해서 남편 나라에 오는 이런 결혼은 항시 위험이 따를 가능성이 많다. 이주여성들이 국제결혼을 택하게 되는 근본적인 삶의 자리, 돈에 눈 먼 중개업들의 횡포, 한국인들의 인종차별의식과 태도, 배려부족이 이주여성들로 하여금 삶을 포기하게 만든다.
이주여성들이 자살을 생각하는 데는 한국남편의 구타와 언어폭력 등 가정폭력과 한국가족의 인격무시 이유도 있지만 한국에 오게 된 동기와 한국에서의 삶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주여성들이 국제결혼을 통해 한국에 오는 이유는 경제적 문화적 종교적으로 다양한 이유가 있다.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경제적 요인으로 결혼이주를 하는 경우다. 집이 가난해서 결혼이주를 하는 경우라고 해도 단순히 빈곤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부모나 집안 사정에 떠밀려 오는 사람과 자기 삶을 개척해 보려는 의지를 갖고 오는 경우가 다르다. 가난 때문이라고는 해도 자기 삶을 개척해 보려는 의지를 갖고 오는 사람들은 의지로 역경을 극복하지만, 어쩔 수 없이 떠밀리다시피 오는 경우에는 상대적으로 적응하기가 더욱 어렵다.
이처럼 떠밀리어 오는 여성들의 경우 처음에 한국생활에 마음 붙이기가 쉽지 않았다고 한다. 거기다 현지에서 들은 정보와 한국에 와서 부닥친 환경들이 다른 경우에는 사기 당했다는 느낌이 들어 더 마음잡기가 힘들다고 한다. 더 극단적인 경우는 자기가 꾸었던 꿈이 결혼생활을 통해 이루어질 수 없을 것 같다는, 기대가 상실감으로 이어질 때 생기는 절망감이다. 특히 떠밀리다시피 온 경우 자신이 시집온 집에서 가족들이 지켜보는데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때 이 여성들의 입장은 막막해진다.
그렇다고 돌아가기도 쉽지 않다. 자신을 떠민 부모들의 입장도 있고, 마을에 따라서는 돌아 온 여성들을 품행이 좋지 않아 쫓겨났다고 색안경 쓰고 보는 곳도 있기 때문에, 또 돌아가야 뾰족한 대안이 없기 때문에 돌아가기가 어렵다. 거기에다 여성이 결혼생활 일 년을 채우지 못할 경우 부모가 손해배상을 하는 것으로 중개업 계약서에 서명을 했을 경우 절박감은 더 극에 이르게 된다. 사면초가에 처했다는 막막함과 절망감으로 자살에 이르게 되기도 한다.
물론 이런 상황에 처했다고 해서 다 절망에 빠져 자살을 결심하는 것은 아니다. 가족이 친절하게 배려해주면 고비를 넘기는 경우가 많다. 결혼이주여성이 처음 한국에 들어 올 경우 가족들이 제일 먼저 할 일은 자국민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통로를 만들어주는 것이다.
우리 센터에서 경험한 일인데 온지 보름 달 밖에 안 되는 필리핀 여성이 시누이의 인도로 한국어 공부를 위해 센터에 왔다. 처음에 너무 우울해 해서 핸드폰을 사주었는데 고향에 한 전화 요금이 3백 만 원이 나와 집이 벌컥 뒤집어 질 뻔 했다고 한다. 그 집에서는 당장 핸드폰을 압수했다. 그러나 난리치는 것으로 끝내지 않고 해결책을 찾아 우선 말동무를 구해주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한국어 가르치는 곳을 수소문해서 우리 센터로 오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친구가 수업이 끝나도 집에 갈 생각을 하지 않는 거다. 말이 통하는 필리핀 친구를 만났기 때문이다. 시누이 말이 그 이후 이 여성의 얼굴 표정이 훨씬 밝아졌단다. 한국어교실에 와서 자국민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스트레스 해소도 하고 한국생활에 대한 정보도 얻고 생활지혜도 배우게 되고 일석삼조의 효과를 보게 된다. 한국어교실에 나오는 이주여성들이 비교적 적응을 잘 하는 것은 한국어를 배워 가족과 의사소통 능력을 키우는 면도 있지만 자국민과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어 극단적으로 가기 전에 감정의 완충역할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여성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한 일 단계는 말이 통하는 여성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지만, 이것으로 끝나서는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데 한계가 있다. 심리적 정신적으로 또한 생활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자국 여성 멘토가 필요하다. 이런 이주여성 멘토는 그냥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육성을 해야 하는 것이고, 이들이 멘토가 되기 위해서는 이들의 삶이 안정이 우선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자기 삶이 불안정한데 다른 여성들에게 좋은 안내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들의 삶이 안정되기 위해서는 이들을 한국사회 통합을 위한 교육도 필요하지만 이들의 한국사회 정착을 위한 인권옹호 장치와 복지제도마련, 이들을 우리와 같은 이웃으로 보는 국민인식이 필요하다. 이주여성이 기름에 물 돌듯 살아가는 분위기, 살기에 암울한 환경을 만들어 놓고 좋은 멘토를 기대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이주여성이 기 펴고 살 수 있는 한국사회가 된다면, 비록 어떤 배경에서 한국에 오게 되었든지 간에 그 사회 분위기 때문에라도 이주여성들이 삶을 포기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란의 죽음 앞애서 우리는 빈곤의 여성화, 이주의 여성화로 파생되는 아시아 여성의 삶과 고통에 대해, 우리 사회의 편협성과 반인권성, 가부장성과 자기만 아는 반공동체성에 대해 진지하게 물어야 한다. 그리고 더 이상 이주여성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없도록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2007년 3월 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