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국제협력단 봉사단원으로 우즈베키스탄에 파견되어 한국어 교사로 활동하다 지난 7월 귀국했다. 우즈베키스탄에서 한국으로 많은 산업 연수생을 파견한다는 소식을 현지에서 듣고 이들을 위해 자원 봉사할 일이 없을까 생각하던 중 서울외국인이주노동자센터와 같은 건물에 있는 이주여성인권센터(이하 여성센터)를 찾아가게 되었다. 거기에서 우연히 여성센터에서 운영하는 쉼터에서 손자를 보고 계시는 고려인 아주머니를 만나게 되었다. 아주머니는 내가 우즈베키스탄에서 왔다는 말에 무척 반가워하셨고 우리는 이런저런 얘기를 잠깐 나누었다. 아이 아버지가 한국인이라고 하면서 그곳에서 살고 있는 것이 이상했지만 초면에 실례가 될 것 같아 더 이상 물어볼 수 없었다.
그리고 얼마 후 여성센터로부터 통역자원활동을 부탁받았다. 시어머니에게 고소당한 우즈벡 고려인 B가 경찰서에 조사받으러 가야하는데 통역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담당하시는 분으로부터 B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쉼터에서 만난 아주머니가 B의 친정어머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왜 그곳에 머물고 있는 지에 대한 의문도 풀렸다.
B의 남편은 수천만 원을 결혼 중매업소에 주고 B와 결혼하게 되었다. 나중에 대질 심문을 하는 자리에서 시어머니는 대놓고 B를 사 왔다고 했다. 건설업에 종사하고 있다는 남편이 알고 보니 일용직 노무자에, 술을 심하게 마시고, 주먹을 휘두른다는 사실을 결혼하고 4개월이 지나지 않아 알게 되었다고 했다. 임신 중에도 남편은 계속해서 폭력을 행사했다고도 했다. 몇 달 전 이날도 B의 남편이 만취가 되 집에 돌아와서는 집안을 난장판으로 만들어놓자 무서운 나머지 파출소에 신고를 했다. 조서를 꾸미고 집으로 돌아온 B가 아이에게 젖을 주려고 했고 시어머니는 아들을 신고한 며느리가 괘씸해 손자를 돌려주지 않았다. 아이를 서로 데려가려고 밀고 당기다 약간의 몸싸움이 있었는데 시어머니는 이에 화가나 며느리와 딸을 도운 친정어머니를 고소한 것이었다. 그 일로 B는 집을 나와 쉼터에서 생활하고 있는데 시어머니는 그때의 괘씸한 마음이 남아있다기보다 이것을 기회로 며느리 마음을 돌려보려는 것 같았다. B의 시어머니 입장이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다. 당신 아들의 문제를 알긴 하지만 며느리가 참고 아들을 바로잡아 잘 살아주었으면 하는 것은 부모로서 당연한 바람이 아닌가? 하지만 B는 다시 돌아가지 않기로 마음을 이미 굳게 먹은 것 같았고, 시어머니는 고소를 취하하지 않으면 두 사람 다 벌금을 내야 한다, 손자를 다시 보기 힘들지도 모른다는 담당 형사의 말에 할 수 없이 고소 취소장에 사인을 했다.
이렇게 해서 내가 할 일은 끝이 났지만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조서를 꾸미는 내내 담당 형사들은 이와 유사한 문제를 상담하는 전화를 끊임없이 받고 있었다. 결혼 중매업소를 통해 상대방을 잘 알지도 못한 채 국제결혼을 하는 사람은 계속 늘고 있는데 한쪽만 탓하기도 어렵다. 한쪽에서는 많은 경우가 신부가 될 사람이 살아온 환경, 문화, 언어를 이해하려는 노력은 거의 없고, 하나의 인격체라기보다는 그냥 돈 주고 같이 살 사람을 사온다는 생각이 지배적인 것 같고, 또 다른 한쪽은 결혼 상대자의 인격이나 됨됨이보다는 조건, 한국생활에 대한 막연한 동경만 가지고 준비 없이 한국에 오니 결혼 생활이 순조롭지 않은 것은 당연한 결과다. 더 걱정이 되는 것은 문제가 두 사람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2세에까지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임신 중 내내 불안에 떨었다는 B는 아이가 그 때문인지 많이 신경질적이라고 한다. 큰 소리가 나면 자그마한 몸을 비틀고, 얼굴을 찡그리는 모습을 나도 몇 번 인가 본 적이 있었는데 마음이 아팠다. 두 사람이 이혼을 하게 되더라도 아이를 누가 키울 것인가가 문제다. 양육권이 그나마 어머니에게 돌아가면 다행이지만 그것도 쉽지 않은 일이라고 했다. 다행인 것은 이렇게 어려운 상항에서도 어머니가 아이를 절대 포기하지 않으려고 한다는 사실이다.
결혼 중매업소는 자신들 이익 챙기기에 바쁠 뿐 자신들이 맺어준 결혼이 어떻게 되든 관심조차 없다. 사업이 잘 되어 가는지 내가 일했던 우즈베키스탄 작은 도시까지 국제 결혼을 원하는 여성들과 수도의 결혼 중매업소를 연결시켜 줄 고려인을 찾고 있다는 소식을 최근에 들은 적이 있다. 우즈베키스탄 수도 곳곳에 걸려있는 한국 사람과의 국제 결혼을 조장하는 플래카드가 또 얼마나 많은 젊은 우즈벡 여성들을 B와 같은 처지로 몰고 갈지….
B의 어머니는 그 동안 속에 담아 두고 못한 얘기들을 내게 쏟아내시면서 하루라도 빨리 우즈벡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하셨다. 한국은 살기 편하긴 하지만 재미는 없는 곳이라고 하시면서 물질적 풍요는 없어도 서로 정을 나누며 살 수 있는 곳이, 친구가 있는 곳이, 가족이 함께 할 수 있는 고향이 좋다고 하신다. 딸의 행복 하나를 바라고 B의 아버지도 산업 연수생으로 한국에 와서 2년간 딸 한국어 수업료, 손자 우유, 기저귀 값 대 주느라 거의 빈 털털이로 우즈벡으로 돌아가셨다고 한다. B는 지금 이혼을 생각중이고 이혼 후에도 가능하면 한국에서 살고 싶다고 한다. 국제 결혼에 실패한 우즈벡 여성들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경우 주위의 따가운 시선을 마주해야하고, 일자리 구하기도 쉽지 않을 뿐더러 아이가 있는 경우 재혼도 어려운 상황을 잘 알기 때문에 내린 결정일 것이다. 하지만 내년 4월이면 만기되는 비자 문제, 아이 양육권 문제등 해결해야 할 일이 많다. 한국이 B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녀에게 기회의 땅이 될 수 있을까? 문제가 잘 해결되어 B의 어머니가 가벼운 마음으로 하루 빨리 우즈벡으로 돌아가실 수 있길 바란다. (김효정: 통역 자원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