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은씨의 아픔을 함께 합니다.
권미주(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 상담팀장)
2000년 이후 급속히 확대되어 온 국제결혼은 우리 사회를 다문화사회라 이름 부르게 하고 있다. 다문화 가정, 다문화 사회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고 인정이 필요하다며 우리 사회는 아주 관대하게 먼 나라에서 이주해온 여성들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있는 듯, 여러 가지 정책을 내놓고 공익광고까지 펼치고 있다. 이 아이는 우리와 같이 대한민국을 응원할 것이고, 자라면 우리와 같이 군대에 갈 것이고, 우리와 같이 세금도 낼 것이라고 그러니까 이 아이를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고. 아이의 알림장을 읽지 못하는 외국인 엄마에게 아이의 알림장을 같이 읽어주는 친절한 한국인 엄마처럼 우리도 친절해야 한다고. 잘못된 것은 아닐지 모르나 그 내용을 곰곰 생각해보면 결국 이 나라에서 이주여성이 자리할 위치는 한국 국민이 될 아이의 엄마로서일때 그들은 가장 뚜렷하게 그 존재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오늘 캄보디아 여성 초은씨 부부의 이 안타까운 현실을 접하면서 이런 생각을 떠올리게 된 것은 이 사건이 결국 이들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가정폭력과 국제결혼이라는 사회적이고 구조적인 문제가 이들을 통해 표면화되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이 사건을 바라보며 첫째로 짚어 볼 것은 가정폭력에 대한 인식의 문제이다. 결혼이주여성들에게 가장 빈번히 발생하는 인권침해적 문제는 가정폭력과 관련된 것이다. 여기서 가정폭력이란 비단 물리적 폭력 뿐이 아닌 언어적, 정서적 모욕과 학대를 포함하는 광의의 의미로서의 가정폭력이다. 여러 실태조사(2005년 보건복지부 통계조사, 2007년 여성가족부 통계조사, 기타 이주여성긴급지원세터 혹은 각 상담소의 통계)를 보면 보통 20% 내외의 여성들이 물리적 폭력을 경험한 바 있다고 한다. 단지 물리적 폭력이 아닌 언어적, 정서적 모욕, 성적 학대, 경제적 방임, 유기 등 모든 종류의 폭력을 범주에 넣는다면 그 수치는 2-3배 이상 높아지게 된다. 단순하게 이야기하면 국제결혼 해 온 두 명의 여성 중 한 명은 언제나 어떤 형태로든지 남편으로부터 폭력적 경험을 당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사실, 국제결혼 가정의 가정폭력 문제는 매우 자주 언론에서 보도되기도 하였고 여성단체들에서 그 심각성을 알려오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해결방안을 찾으려는 적극적 노력은 별로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결국 이런 가정폭력(사실 보다 정확한 말은 아내 폭력이라고 생각된다)문제가 사적 영역에서 공적인 문제로 전환되는 경우는 두 가지이다. 후안마이 사건에서처럼 맞아 죽든가, 아니면 이번 초은씨 경우처럼 남편을 죽이든가. 사실 문제는 피해가 드러나야만 성립되고 그래서 피해가 발생한 이후라야만 그 해결이 시작된다. 그런데 여기서 가장 중요한 문제점 하나가 부각된다. 폭력피해를 입은 여성들은 몸으로 그 피해를 증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이번 사건을 접하면서도 계속해서 돌아보게 되는 문제점이다. 얼마나 맞았냐? 얼마나 아팠냐? 가부장적이라 할 수 밖에 없는 우리 사회는 가정폭력 피해자에게 ‘당신이 피해자인 것을 몸으로 증명해 보이십시오’ 라고 요구하고 있다. 남편에게 맞았는데, 고통을 당했는데, 그 남편에게 맞았다는 걸 증명해 주는 피해자 인정 역시 법(남성)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 바꾸어 말하면 가부장적 체제 안에서는 피해의 문제가 내가 고통받았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라, 누군가(남성)가 인정해 줘야만 고통이 되고 피해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나마도 몸에 남아 있는 흔적으로 그 고통과 피해의 정도를 인정받는 형태로 말이다.
이런 여성에 대한 정치적 입장은 국제결혼에서 더욱 심각해진다. 국제결혼을 한 여성들의 경우, 폭력 피해자임의 증명 유무는 그들이 한국에서 체류하기를 원할 때 그것을 가능케 하는 유일한 증거이다. 현재의 제도는 폭력의 피해자임을 몸으로 증명하는 여성에 대해서는 미흡하지만 어느정도의 법률적 지원 시스템을 마련하고 있으나, 그렇지 않은 경우 특히 아이가 없는 여성에 대해서는 어떠한 지원체계도 없는 것이 현실이다.
오늘 우리가 초은씨를 보며 더욱 안타깝게 여기는 것은 그녀가 당한 폭력이 몸으로 증명해 보일 수 있는 폭력이 아니라(아마 그랬다면 그것은 훨씬 더 쉽게 폭력으로 인정받았을 것이고 쉽게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어냈을지도 모른다) 무형적 폭력에 가깝다는 것이다. 다른 자료에서 이야기한 것과 마찬가지로 그녀는 18살의 어린 나이로 임신 3개월인 몸으로, 언제나 술에 취해 사는 20살 연상의 남편으로부터 끊임없이 시달림을 당했다. 그것이 외형적으로 어느정도의 강도를 가졌냐에 기준을 두는 것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고통의 강도는 너무나 주관적인 것이며 그것을 제 삼자가 객관적으로 증명해내기란 매우 조심스럽기도 하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어린아이가 말을 익혀가는 과정을 거치듯 한 마디 한 마디 배워가며 낯선 땅에서 어떻게든 적응하고 살아봐야겠다고 애쓰며 발버둥쳤을 초은씨의 마음의 고통을 우리가 짐작할 수 있을까? 사람이 고통받는 것에 대해서조차 우리는 객관적이라는 이름으로 양적 정도를 따져야만 하는가?
결혼이주여성들은 스스로가 말하곤 한다. “선생님, 때리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도 있어요. ” 라고. 이들이 말이 통하지 않는 먼 나라에서 보통 15-20세 연상인 남편과의 관계에서 느끼는 폭력의 강도는 단지 몸에 관한 것만이 아니다. 언제나 술에 취해 소리를 지르고 집안의 물건을 부수는, 또는 너를 데려오는데 얼마가 든 줄 아냐며 걸핏하면 너희 나라로 돌려보내겠다고 협박하는, 마치 딸인양 막내여동생인양 대하며 어서 아이만 낳아주기를 기대하는, 언제나 낯선 이방인 같은 마음으로 서 있어야 하는 심리적 고립감에 위축되는 이 모든 것이 여성들에게는 심각한 무형적 폭력임은 분명하다. 결국 타인에 대한 폭력과 그 폭력의 범위에 대해 관대하고, 어느 정도의 폭력으로 상대를 길들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회적 문화와, 가정의 문제에 대해서는 지나칠 정도로 사적영역이라며 공적개입을 꺼리는 사회의 구조가 오늘도 어딘가에서 후안마이와 같이 또는 초은씨와 같은 폭력의 공포에 떨고 있는 누군가를 방치하고 있으며 언제 또 제2, 제3의 초은씨 사건, 후안마이 사건을 불러일으킬지 알 수 없게 하는 것이다.
이 사건을 보면서 두 번째로 짚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부분은 경찰조사과정에서의 문제이다. 초은씨가 처음 경찰에서 조사를 받을때 그녀의 말을 통역한 사람은 캄보디아 말을 할 줄 아는 베트남 여성이었다고 한다. 경찰의 첫 조사 이후 구치소와 이후 교도소에서 그녀를 접견하고 진술을 받을때, 그리고 그 이후로는 계속 대구 이주여성인권센터의 회원으로 있는 캄보디아 출신 이주여성이 초은씨의 말을 통역해주고 있다. 그녀에 따르면 초은씨가 처음 경찰 진술당시 그 통역관 여성이 자신에게 겁을 많이 주었다고 한다. 워낙에 당황한데다 통역하는 여성이 심리적인 압력을 주었기 때문에 자신에게 불리하게 초기진술을 한 것으로 보인다. 경찰의조서기록을 문건으로 확인해보지는 않았지만 구두로 전해들은 바에 의하면 초은씨에게 상당히 불리하게 작성되어 있다고 한다. 이후 진술과 조사 과정에서 사실이 제대로 밝혀지기는 하겠지만, 외국인을 피의자로 조사하면서 국가의 공적기관에서 공식적 통역관도 없이 게다가 당사자 나라 사람도 아닌 그 나라 말을 할 줄 안다는 이유로 타국 사람을 통역으로 세우고 진술을 받는다는 것은 매우 무책임한 일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외국인을 바라보며 그들을 대하는 우리 사회의 태도가 어떠한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고도 할 수 있다. 혹시라도 우리 내면에 존중받고 도움받을 수 있는 외국인은 우리에게 해를 입히지 않는 한 이라는 단서가 달려 있지는 않은가?
마지막으로 짚어보아야 할 지점은 지금의 국제결혼이라는 형태의 결혼제도에 관한 근본적 문제제기이다. 급속한 국제결혼의 증가 배경에는 개인의 필요에 따른 요구에 부응한 면도 있었지만 국가와 사회가 이를 정책적으로 묵인, 또는 확산시키는데에 역할을 감당했음은 사실이다. 이는 사회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부르고 있는 ‘급속한 농촌의 공동화 현상’ 과 ‘저출산’ 현상에 대한 하나의 대안책이었다. 거기에 국제결혼 중개업체라는 상업화된 이윤을 추구하는 조직이 동남아시아권의 여성들에 대해 우리 사회의 가부장성을 채워줄 수 있는 순종적이고 순결한(?) 여성들이라는 이미지를 만들면서 개인의 결혼을 공장에서 물건을 만들어내듯 획일적으로 양산해해는 기형적 형태를 띠게 된 것이다. 이러한 배경을 가지고 시작한 국제결혼은 결국 여성들로 하여금 한국 내에서 결혼이라는 울타리 내에서 그리고 가정이라는 범위 안에서 아내와 엄마로서의 역할만을 묵묵히 수행하기를 강요하고 있다. 그 울타리를 벗어나는 여성들에 대해서는 사회와 국가는 책임지기를 원치 않는다. 아내의 위치를 박탈당한 또는 견딜 수 없는, 엄마로서 역할을 할 수 없는 이주여성들은 고향에 돌아가지도 못한 채 불안과 절망으로 그들의 미래를 떠안아야 한다. 물론 개인간의 사적 필요에 의해 국제결혼이라는 형태의 결혼을 취하는 것에 대해 어느정도까지 공적인 규제와 개입이 가능할 것인가에 관해서는 수많은 논의과정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기형적 형태의 국제결혼이 이러한 형태로 지속되는 한, 우리 사회에는 수많은 피해자이며 동시에 가해자가 될 수 밖에 없는 이주여성들이 존재할 것이다. 어쩌면 한국 남성들 역시 국제결혼에서는 끊임없이 가해자이면서 동시에 피해자로 남게 될 것이다.
초은씨는 가정 내에서 폭력의 피해자였으나 이제 남편살해라는 죄명을 가진 가해자로 18살의 어린나이에 차디찬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다. 행복을 찾아 먼 나라로의 이주를 택한 그녀 자신만의 책임인가? 또는 그녀가 잘 살 수 있도록 돌보지 못한 그녀의 남편과 가족들만의 책임인가? 과연 우리 사회는 이 어린 18살의 외국소녀에 대해 책임이 없는가? 가슴깊이 마음 아프게 진지하게 물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거기에 대답하고 책임져야 할 것이다. 타인의 고통과 권리에 너무나 둔감한 우리들 자신의 무관심과 야만성을 반성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