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은 씨와의 동행, 그 짦고도 긴 여정!

                                                                                   한국염 /대표
초은이와 캄보디아 여정에 서다.

초은 씨의 귀국 길에  이틀 동안 동행을 했다. 24일 저녁 비행기를 타고 가서 26일 밤 비행기로 돌아왔으니 날 수로는 2박 3일의 여정인 셈이다. 언론에 발표된 대로  초은 씨는 18살에 20살 나이 차이가 나는 남편과 국제결혼 해 한국에 와서 살게 된 캄보디아 여성이다. 평상시에도 남편의 잦은 폭력이 있었고, 사건이 일어나 그날에는 남편이 발로  배를 걷어차려 했다. 그녀는 임신 중이었다. 아기가 죽을지 모른다는 긴박감에  부엌칼을 들고 맞서다 남편을 칼로 살해하게 되었다. 대구에서 일어난 사건이라 우리 센터의 대구지부인 대구이주여성인권센터에서 초은 씨를 위한 지원활동을 시작했다. 우리 센터 본부에서는 이 사건을 받아 전국에 있는 이주단체와 여성단체와 더불어 “가정폭력에 의한 정당방위”를 주장하며 구명운동에 나섰다. 결과적으로 초은 씨는 법정에서 10년 구형에 4년을 선고받고 교도소 생활을 하다  부산의 한 시설에서 아기를 낳았다.  아기는 태어난 20일 만에 외할머니 품에 안겨 캄보디아로 갔고, 초은 씨는 다시 청주교도소에 수감되었다. 초은 씨가 청주교도소로 이감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청주에 있는 우리 센터의 지부인 충북이주여성인권센터 고은영대표와 연결해서  이후 충북센터에서 쭉 그녀를 돌보았다.


광복절 특사로 풀려 난 초은
이 초은 씨가 이번 815광복절특사로 석방되어 외국인보호소에 있는데 21일에 귀국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문득 초은을 홀로 보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장은 석방되어 돌아간다는 사실, 엄마와 딸을 만나게 되었다고 기뻐하겠지만, 홀로 다섯 시간의 비행기 안에서 떠오를 회한들- ‘죄인이 되어 돌아간다’는 착착합, 마을 사람들의 시선에 대한 걱정, 딸 유나의 미래에 대한 걱정 등등-로 마음이 무거울 초은 씨!  우리가 동행한다면  위안과 격려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였다. 그리고 캄보디아에 돌아가도 딸과 함께 정착하기가 어려울 텐데 그 일에 도움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고은영 대표에게 “같이 가자. 그대는 그동안 초은 씨를 돌보았으니 초은이 함께 가면 힘이 될 거다. 나는 캄보디아의 지인을 만나 그의 미래를 위한 방안을 찾아보겠다.” 하고 제안을 했다. 고대표도 기꺼이 찬성을 해서 동행할 준비를 시작했다.  우선 21일에 떠나기로 한 초은 씨의 귀국일정을 초은 씨의 동의하에 외국인보호소 측과 의논해서 24일로 늦추었다. 동행할 준비를 하면서도 내 머리를 떠나지 않는 생각은 “만일 초은의 딸 윤하가 커서 엄마로 인해 자기 아빠가 죽은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들이 감당해야 할 그 충격과 고통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도 초은 씨가 캄보디아에서  잘 정착하는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동행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언론에서 같이 동행하면 안되느냐고 관심들을 보였지만 사절했다. 언론에서 그녀의 귀국을 이슈화하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판단에서였다.

24일 오후 초은 씨의 비행기 좌석을 확인하고 그 옆자리를 배정받았다. 7시 30분 비행기 문 닫기 바로 직전에 그녀가 스튜어디스와 함께 들어왔다. 고대표가 그녀를 얼싸안고 대대적인 환영을 벌였다. 바로 어제 면회를 했는데도 말이다. 비행기에서 귀국하는 소감을 물었다. “돌아가서 딸 윤하를 볼 생각을 하니 기쁘고, 시댁 식구에게 미안하다. 윤하를 잘 키워 시어머니에게 보이면 시어머니도 마음이 풀리지 않겠느냐?, 한국에 많은 정을 느낀다.  돌보아 준 사람들에게 감사하다.” 하는 인사를 전했다. 한국에 산지 3년 채 안 되는 짧은 기간이었음에도 한국말 이해가 빠른 편이다. 


공부가 하고 싶단다.
캄보디아에 도착하니 비행기 문 앞에서 캄보디아 출입국직원들이 대기하고 있다가 초은 씨를 데려갔다. 우리도 따라 붙었다. 초은 씨에게 누구냐고 묻고는 한국에서 돌보아주고 같이 온 사람들이라고 했더니 같이 있도록 허락했다. 공항출입국사무소에서 서류 심사가 진행되었다. 이것저것 묻더니 우리에게 엄지손가락을 쳐들어 보이며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우리를 마중 온 후배말이 캄보디아 사는 동안 공무원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받아보기는 처음이라고 했다. 출입국직원들도 초은 씨의 사연을 알고 있었는데 우리의 마음 씀이 매우 고마웠나보다. 원래는 초은 씨의 어머니나 가족들이 와서 초은 씨을 데리고 가야 하는데 우리가 하루 밤 같이 자고 다음 날 데려다 주겠다고 하니 허락을 해주었다.

밤에 초은 씨와 이 이야기 저 이야기를 나누었다. 무엇을 하고 싶으냐고 물었더니 처음에는 기술을 배웠고 싶다더니 사실은 공부를 하고 싶단다. 처음에 한국을 떠나 올 때는 그녀의 자활을 위해서 캄보디아 여성센터가 운영하는 쉼터에 그녀와 아기를 위탁할 생각을 했었다. 토은씨가 고향에 살기가 어려울 것같아서였다. 캄보디아 여성쉼터는 가정폭력, 성폭력, 인신매매 피해 여성을 위해 숙식을 제공하며 기술교육을 하는 자활센터로서 아기도 함께 살 수 있는 곳이었다. 3년 전 이곳을 방문한 적이 있고, 이곳 실무자가 봄에 우리 센터를 방문해서 서로 연대하기로 약속을 한 터였다. 기술을 배우고 싶다고 했을 때는 이 단체를 생각했으나 공부를 하고 싶다고 하니 그 꿈을 이루어주고 싶었다. 초은 씨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상당히 똑똑하고 한국어도 잘 하기에 공부를 계속하면 전망이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후배가 하는 문화센터에서 이 문제를 의논했다. 초은 씨의 어머니가 아기 유나를 돌보고 초은 씨가 공부를 계속하는 것이 가장 좋은 길이라는 의견이 모아졌다. 초은 씨는 8학년, 우리 식으로 중학교 2학년을 마친 상태여서 9학년에 들어가 중학교 졸업장을 따고 고등학교에 입학하는 것이 바람직하겠다는 의견이 모아졌다. 그녀가 공부를 계속한다면 방을 얻는 일, 학교 수속하는 하는 문제 등 학교에 관한 문제는 후배 부부가 책임지기로 했다. 초은 씨도 학교에 다닐 수 있게 되면 좋겠다, 새 꿈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고 기뻐했다. 이건 초은 씨 어머니가 계속 윤하를 키운다는 전제하에서 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어머니의 동의가 필요했다.

초은 씨의 집은 프놈펜에서 앙코르와트 가는 중간 마을에 있었다. 초은 씨가 우리가 마련해준 핸드폰으로 어머니께 미리 연락을 해두었기 때문에 초은의 식구들이 모두 기다리고 있었다. 초은 씨네 식구는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어머니와 위로 결혼한 오빠, 언니와 아래로 아직 어린 여동생과 남동생이 함께 살고 있다. 캄보디아는 아직도 모계사회의 유습이 있는 지라 이미 결혼한 언니, 오빠네 식구도 어머니 집 주위에 모여 살고 있었다. 마침 3일 후인 8월 29일이 윤하의 첫돌이 되는 날이었다. 초은 씨가 9달 만에 딸을 처음 안아보았다. 그러나 아기는 엄마를 오랫동안 떨어져 있던 터라 낯가림을 하며 할머니만 찾았다. 초은 씨는 이런 딸을 억지로 끌어안으며 매우 섭섭해 했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진다고 위로를 했지만 옆에서 지켜보는 우리도 마음이 언짢았다. 아기가 잠든 것을 보고 초은 씨는 어머니와 초은 씨의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가 윤하의 양육비를 지원한다면,  돈이 없어 중단한 공부를 계속 할 수 있으니 자기도 환영한다고 동의를 했다.

다음으로 해결할 것은 윤하의 법적 문제였다. 윤하가 한국국적이다, 캄보디아 국적이다 서로 다른 의견들이 있었기에 유나 여권을 보았더니 한국국적이었다. 그러면 캄보디아에서 이중국적을 얻어야 하는지, 출생신고 문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의 문제를 처리하는게 중요한 문제로 떠올랐다. 이를 위해 다음 날 ‘이주와 개발’ 세계포럼에서 알게 된 변호사를 찾았다. 이 변호사는 우리 식으로 말하면 ‘가정법률상담소’ 같은 데서 활동하는 분으로 역시 지난 봄 우리 센터를 방문한 적이 있었고, 이미 우리 쉼터에 있는 캄보디아 여성 여권문제를 도와주고 있는 터였다. 윤하의 문제와 초은의 법적문제를 의논했더니 자기가 책임지고 해결하겠다고 했다. 중요한 문제는 모두 예상보다 잘 해결된 셈인데 초은이 학교공부를 계속할 수 있도록 장학금을 모으는 과제가 남은 셈이다. 갈 때 한국에서 지인을로부터 얼마의 돈을 모금해 갔는데 후배에게 맡겨 학교 입학하는데 필요한 경비로 쓰도록 했다. 학교 다니는데 생활비를 포함해서 한 달에 200달러, 일 년에 2,500달러가 필요하다고 한다. 돈을 쌓아놓고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하면 주변의 도움으로 어떻게 든 해결이 되는 삶을 계속 살다보니 잘 되겠지! 하는 마음이다. 불과 이틀 동안의 짧고도 긴 여정! 그래서 몸은 고단했지만  마음은 가뿐했다.

왜 초은의 문제에 관심하는가?  

그렇게 조심했음에도 불구하고 초은 씨와 동행한다는 기사가 모 일간지에 실렸을 때 한국민의 반응은 두 가지였다. 왜 살인을 정당화하느냐?, 장애인인즐 알고 왔으면 감수하고 살아야 하는게 아니야? 왜 당신네 단체는 이런 범죄자를 도와주느냐? 등등 항의를 많이 받았다. 다른 한쪽에서는 초은 씨와 아기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 후원금을 보낸다, 잘 생각했다. 많은 힘이 될 것이다, 좋은 일을 한다..등 서로 다른 반응을 보였다. 이건 초은 씨 재판과정에서도 계속 부각되었던 반응들이다.

초은 씨는 가정폭력의 피해자이면서 그 방어과정에서 가해자로 입장이 바꾸어 살인자가 되고 말았다. 18살의 어린 나이에 낯선 나라에 결혼해 와서 임신을 하고 가정폭력으로 남편을 살해하게 되었고, 감옥살이 중에 출산을 해서 20일 만에 자식을 떼어 보내고 다시 감옥살이를 하고…보통 사람들이 일생을 통해 겪을 일을 불과 2년 사이에 겪고, 20살의 나이에 혼자 자식을 길러야 하는 그 질곡을 누가 만들어냈는가?

우리가 초은 씨의 문제에 관심을 갖는 것은 초은 씨의 문제는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결혼이주여성이 직면하는 가정폭력 후유증의 심각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반면거울이기 때문이다. 가정폭력의 피해자이면서도 남편살해라는 죄명으로 법정에 섰다가 특별사면으로 고향에 돌아간 캄보디아 여성 초은 씨! 그가 겪은 같은 고통을 다른 이주여성들이 겪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코리안 드림을 안고 결혼해  왔다가  베트남 여성 탓티황옥처럼 남편에 의해 죽임을 당하거나, 초은처럼 폭력 남편폭력에 방어하다 죽이는 자가 되어야 하는 그런  비참한 일이 이 땅에서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