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가 되기 위한 첫 걸음

이화여자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김희준

  베트남 처녀와 결혼하세요.” 발칙한 형광 노란색 현수막이 뭇 남성들을 유혹하며 펄럭거린다. 이런 모습은 요즈음 길거리를 지나다니면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인지 마주칠 마다 오만가지의 오묘한 감정들이 머릿속에서 얽히고설킨다. 흔하디 흔해 낯설지 않은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칠 수 없는 것은 아마 내가 국제결혼을 통해 한국으로 오게 된 여성들과 만들어 나가고 있는 특별한 인연 덕분 일거다.

  나와 이주여성들과의 인연의 시작은 확실하지 않지만 2005년 11월 즈음 인듯하다. 2학기가 되면서 활동하게 된 이주여성과 함께 한국어 공부를 하고, 한국 문화 체험을 하는 학내 동아리 ‘다정’을 통해서였는데, 다정의 2학기 첫 행사였던, 이주여성과 함께 하는 어린이대공원 나들이를 마치고 종로구 숭인동에 위치한 사단법인 한국 이주여성 인권센터가 운영하는 한국어 교실의 교사 자원 활동을 하게 된 것이 이주여성들과의 본격적인 만남의 시작이었다.

  한국어 교실에서 직접 수업을 하기 전에 나는 몇 가지 착각을 하고 있었다. 첫 번째 착각은 나는 한국에서 태어났고 한국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며 20여 년을 쭉 한국에서만 살아왔으니 한국어를 가르치는 것 정도야 정말 식은 죽 먹기처럼 간단한 일로 여겼던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나의 근거 없는 자만심이었다는 것을 얼마 안가 알게 됐다. 수업을 하다가 내가 평소에 흔히 사용하던 단어나 문장들도 막상 쉽게 풀어 설명하려면 막히기 일쑤였고, 당연시했던 문법 사항들을 개연성 있게 설명하는 것은 정말 어려워서 숨이 턱턱 막히기도 했다. 나의 두 번째 착각은 이주여성들과의 매개 언어가 있을 거라는 예상이었다.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이주여성들은 주로 모국에서 고등 교육을 받았지만, 박봉으로 인한 생활고에 시달리다가 어쩔 수 없이 한국행을 선택했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고 내가 만나게 될 분들도 그와 같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만나게 된 사람들은 텔레비전에서 보던 분들과는 달랐다. 거의 대부분이 가난한 베트남 시골에서 온 여성들로 초등학교 정도의 수준의 교육 과정만 이수하였기 때문에 영어는 모르는 것이 당연했고, 역시 나의 짧은 영어는 통할 리가 없었다. 세 번째 착각은 내가 열심히만 가르친다면 나와 함께 공부하는 학생들도 열심히 나를 따라와 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내가 처음 맡은 반의 학생들은 나의 수업을 듣는 둥 마는 둥 하고, 알아듣는 지 못 알아듣는지 알 수 없는 멍한 표정으로 수업을 했다. 숙제를 내줘도 거의 해오지 않고, 따로 예습복습은 하지 않는 분들도 많았다. 나를 무시하는 것인지 공부를 할 생각이 전혀 없는 것인지, 숙제의 중요성을 아무리 언급해도 그 때만 알아들을 뿐이지 다음 시간에도 역시 숙제 부분은 빈 칸이었다. 뭐 나중에는 공부하는 ‘습관’이 양성될 수 없었던 그들이 가진 환경적인 요인을 알게 되고 이해하게 됐지만 처음에는 이해 할 수 없어서 많이 힘들었다.

  한국어 교실에서 교사활동을 처음 시작했던 작년은 사단법인 한국 이주여성 인권센터가 처음으로 한국어 교실을 개관한 해이기도 해서, 교실의 운영 면에서 아직은 미흡한 점이 많았다. 반도 수준별로 나눈다고 나누었지만 실력은 체계도 없이 전부 들쑥 날쑥이었고, 이주여성에게 초점을 맞추어 발행된 교재도 없어 가시성이 떨어지는 임시로 만든 흑백교재를 제본하여 사용하였고, 부교재나 보조교재의 상황도 열악하였다. 그래서 활동 초기에는 먼저 활동하고 있던 선배 언니와, 한국어 세계화 재단에서 파견을 나오신 선생님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한국어 교육 전문가로 활동하고 계시는 분의 강의를 듣기도 했는데, 이주여성을 위한 한국어 교육 보다는 한국으로 온 외국인 유학생의 경우에 맡는 수업 방식이라 실제 수업에 적용하기에는 무리가 따랐다. 상황에 적용할 수 없는 전문가의 안내보다는 나보다 먼저 많은 교사로서 자원 활동 경험을 하신 분들이 나누어주신 지식은 내가 수업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다른 분들의 수업하는 모습을 보며 닮고 싶은 부분이나, 배우고 싶은 부분은 비슷하게 따라해 보며 내 방식대로 소화해나갔고, 특히 선배 언니의 도움으로 부교재를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과제물이나, 학습지는 어떤 식으로 구성해야 하는지 많이 알게 되었다. 한국 국제협력단의 단원으로 베트남에 한국어 교육을 다녀오셔서 간단한 베트남어를 말 할 줄 아시는 한국어 세계화 재단 소속 선생님의 도움으로 어려운 설명을 가끔은 베트남어로 직접 말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기도 했다. 이렇게 여러 사람의 따뜻한 관심과 도움으로 센터와 나의 수업은 점차 자리를 잡게 되었다. 더불어 시간이 지나면서 한국어 교실도 학기제 운영, 레벨테스트를 통한 수준별 반 편성, 이주여성을 위한 총 천연색의 정식 교재 출판, 칠판이나 교실 기자재 같은 교구 정비, 학생과 학급의 수 증가 등의 방식으로 점차 체계를 갖추어 갔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리버리 초보선생님이었던 나는 전문가처럼 능숙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내가 가진 것을 나만의 방식으로 전달할 수 있는 정도의 경험치를 갖게 되었고, 학생들도 점차 한국어 구사 능력이 나아지는 것이 눈에 보여 많은 기쁨을 느낀다.

  내가 한국어 교사를 처음 시작했던 때 맡았던 반의 학생들은 모두 일곱 명이었다. 나는 결혼을 안 한, 심지어 남자친구 조차 없는 대학생이고, 그들은 나와 비슷한 나이 또래이지만 결혼을 해서 남편, 시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는 한 가정의 아내이자, 며느리였다. 그리고 남편과의 적지 않은 나이 차 때문에 한국에 온지 얼마 안됐지만 빨리 임신을 해서 2세를 낳아야만 하는 의무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수업을 시작한지 얼마 안 되어 다섯 명이나 임신 소식을 알려 와서 반이 존폐의 위기를 걱정하기도 했었다. 우리 반 학생들은 다들 미인이었는데, 그 중 눈에 띄게 예쁜 한 명이 있었다. 베트남에서 왔지만 인도풍의 외모를 가지고 있던 그녀는 1987년 생으로 한국나이 열아홉 살, 나와 동갑내기였다. 공부하는 것을 정말 싫어해서 한국말이 도통 늘지 않는 바람에 내가 남편에게 편지를 써서 공부하는 것 좀 많이 도와달라고 했을 정도였다. 12월이었나, 나는 그녀의 임신 소식을 들었다. 아기가 뱃속에 있다며, 달력을 펴 놓고 아기가 이때 태어날 거고 이 날 병원에 가서 확인했다고 수줍은 미소를 띠며 말하던 그녀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아기가진 것을 알게 된 후 태어날 아이를 위해 한국어 공부를 더 열심히해야한다고 말했지만 아무래도 몸이 힘들었는지, 산달이 2개월여 앞으로 가까워진 6월 쯤 부터 한국어 교실에 나오는 것을 그만두고 말았다. 처음으로 만나 많은 정을 주었던 학생이라 안 나오는 것을 알고 많이 섭섭해서, 아기를 낳으면 꼭 보러가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아쉬운 마음을 달랬었는데, 이런저런 핑계로 아직까지 연락도 해보지 못해 미안한 생각이 든다.  8월에 아기를 낳는다고 했으니, 지금은 그녀 닮은 예쁜 아기가 세상의 환한 빛을 쬐고 있을 거다. 사실 처음 임신소식을 들었을 때는 축하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아기가 아기를 낳는 거라는 생각에 걱정이 앞섰다. 하지만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는 말이 있듯이 아기를 품에 안은 이상 그녀는 세상 그 누구 보다 좋은 엄마가 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나와 한국어 교실 초급반을 함께 시작했던 학생들은 지금 중급반으로 진급해서 다른 선생님과 함께 공부를 하고 있다. 중고등학교 때 많은 선생님들이 첫 제자들이 기억에 많이 남는 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나도 나의 첫 번째 학생들과 함께 했던 순간들이 정말 좋은 추억이 되었다. 삐뚤빼뚤한 글씨로 적은 크리스마스카드를 받고 화장실에 가서 몰래 눈물을 흘렸던 일, 함께 나들이 가고, 삼겹살을 먹었던 일, 출산한 학생의 집에 방문해서 교육을 했던 일, 예상치도 못한 스승의 날 선물을 받고 기뻐했던 일, 수업시간에 있었던 소소한 일들까지 정말 한 순간 한순간들이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아있다. 지금의 학생들과는 함께 공부를 시작한지 2개월이 다 되어 가는데 우연히 이번에도 베트남 학생이 7명인 초급반을 맡게 되었다. 수업이 너무 힘들었던 어떤 날은 센터의 한국어 교실 담당 선생님께 볼멘소리로 한국말 거의 못하시던 분들 이제 말 좀 통하게 만들어 놨더니, 또 말 하나도 안 통하는 사람들 반에 데려다 놓았냐는 말을 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우스개 소리 일 뿐 의사소통이 거의 불가능 했던 학생들이 능숙하게는 아니지만, 남편 혹은 가족과 대화를 하고, 텔레비전 드라마를 봤을 때 어느 정도나마 이해하고 웃는 모습을 보게 될 때 일주일에 겨우 2시간을 투자해서 할 수 있는 일 치고는 너무 많은 보람을 얻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한국인 어머니와 미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나 미국 슈퍼볼 MVP가 된 하인스워드 선수가 방한 한 이후로 혼혈인이나, 국제결혼 가정에 대한 정부의 관심이 급작스럽게 늘어나고 있다. 언론에서는 하루걸러 하루 꼴로 국제결혼 가정에 대해서 보도하고 있고, 정부의 정책이나 언론의 보도 등으로 인해 예전과 같은 무분별한 편견은 많이 줄어들고 있음을 체감한다. 하지만 언론에서 조명하는 것처럼 힘들고, 어두운 면을 가진 국제결혼 가정도 있지만 내가 만난 대부분의 이주여성들은 한국에 와서 예쁜 가정을 꾸리고 행복하게 살고 있기에 가끔은 언론의 편향적인 보도가 또 다른 편견을 조장하는 것은 아닌지 우려가 되기도 한다. 2006년 오늘, 한국에는  국제결혼 가정과 이주여성들 그리고 그들의 아이들은 한국인으로서 한국 사회의 일부가 되어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이주여성들은 평생 써오던 모국어를 버리고 한국어를 쓰며 살아가야 하는 현실, 바꿀 수 없는 피부색인데 그것을 이상하게 바라보는 시선을 인내하며 살아가야 하는 현실, 문화적인 이질감에 혹독한 적응기를 거쳐야 한다는 현실 등 이렇게 버거운 하루하루를 감당하며 살아가고 있다. 나의 한국어 교사 자원 활동은 그들이 짊어지고 있는 무거운 짐을 나누어지기 위한 목적으로 시작되었고, 내가 내딛은 걸음은 아주 작은 한보이지만 진정한 하나가 되는데 보탬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예전에 베트남 방송사에서 한국어 교실에 취재를 나온 적이 있다. 그 날 나온 프로듀서는 나에게 베트남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면 많은 돈을 벌 수 있을 텐데 왜 여기서 무료로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냐고 물었다. 나는 그 날 확실한 대답을 하지 못했다. 나의 미숙한 영어 실력 때문이기도 했지만, 할 말이 잘 생각나지 않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누군가가 나에게 다시 그 질문을 한다면 내가 가진 젊음과 능력으로 돈보다 더 귀한 것을 얻고 있기 때문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것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