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티남은 ‘죽은 나무’가 아니다.
지난 5월 24일 새벽, 23살의 베트남 여성 황티남씨가 칼로 수 십 차례 난자를 당해 주검이 되었다. 남편이 휘두른 폭력 앞에서 스믈 세 살의 꽃다운 나이가 무참히 스러져버렸다. 이 소식을 들어면서 드는 생각은 “언제까지 이주여성들이 죽어나가야 하는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일 년에 두번 씩은 이주여성들이 참혹하게 죽은 일이 발생한다. 작년 7월에는 스므 살 난 ‘탁티 황옥’이라는 베트남 여성이 정신질환자인 남편에게 살해당했고, 불과 2개월 후인 9월에는 강체첵이라는 몽골여성이 가정폭력으로 시달리다 집으로 피신해 온 고향 친구의 동생을 보호하려다 그 여성의 남편에게 무참히 살해당했다. 이런 큼직한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황티남씨가 가정폭력으로 죽임을 당한 것이다.
황티남씨가 결혼으로 한국에 온 것은 겨우 9개월 남짓이다. 시집살이가 매우 혹독했던 듯하다. 같은 베트남 출신으로 한 마을에 살고 있는 친구에게 남편에게 맞았다는 문자와 함께 구타당한 흔적이 있는 사진을 보냈다고 한다. 얼마 전에는 시어머니가 황티남이 잘 씻지 않는다고 가위로 머리칼을 자르고 폭력을 휘두르는 바람에 약 한달 반 쉼터에서 머무른 적도 있다. 남편이 시어머니와 분가를 하기로 하고 원룸을 얻어서 다시 잘 살아보겠다고 약속해서 남편에게 돌아갔다. 남편은 약속대로 분가를 했으나 놀음을 즐긴듯하다. 남편이 평소 새벽까지 원룸에 친구를 불러 포카를 치거나 친구들과 함께 도박을 하려 자주 나가는 바람에 부부갈등이 있었다고 한다. 이웃들의 증언에 따르면 하루는 황티남씨가 밤이 늦었는데도 들어가지 않고 밖에 있어서 “왜 집에 가지 않느냐?” 고 하자 “남편 친구들이 집에 있다.”고 이야기 하는 것을 들었다고 한다. 이때 이미 황티남씨는 임신중이었다. 남편과 이혼하고 싶다고 친구들에게 하소연을 했는데, 친구들은 ‘아기가 있으니 참고 살아보라.“고 말했다고 하는데, 황티남씨가 죽은 후에 ”괜히 자기들이 말려서 친구가 죽게 되었다.“고 애달파하고 있다. 죽임을 당한 그날, 남편의 증언에 의하면 ”아내가 이혼 말을 꺼내서 화가 치솟아올라 그랬다.” 고 한다. 칼 하나를 휘두르다가 부러져서 다른 칼로 다시 휘둘었다. 그렇게 해서 54군데나 난자당해 젊디젊은 베트남 아내는 목숨을 잃었다. 이혼에도 목숨을 걸어야 하다니! 그때 황티남은 출산한지 불과 19일밖에 안된 상태였다. 보통의 한국아내였으면 산후조리에 여념이 없을 때였는데, 얼마나 고달펐으면 생후 19일 된 자식을 두고 ’이혼‘을 말했겠는가? 이웃의 신고를 받고 경찰에 갔을 때는 피가 낭자한 엄마의 시신 옆에서 아기가 울고 있더란다. 신생아로서 엄마를 잃은 그 아기의 삶은 어떻게 될지…지금 그 아기는 당국의 주선으로 보육원에 있다.
이 황티남씨의 죽음을 보면서 떠오르는 생각은 아직도 뇌리 속에 생생한, 후안 마이의 죽음이다. 2007년 후안 마이 역시 남편에게 맞아 갈비뼈 18대가 부러져서 참혹한 죽음을 당한 일이 있는데, 이번에 떠오른 생각은 후안 마이의 죽음 자체 보다도 그 재판을 담당한 김승수판사의 소견문이다. 판사는 ‘피해자’에게 용서를 구하고 싶은 마음이라면서 이런 사태의 책임을 그 남편에게만 묻고 싶지 않다. 이 사건은 “우리 사회의 총체적인 미숙함의 발로”라고 말하면서 “우리보다 경제적 여건이 높지 않을 수도 있는 타국 여성들을 마치 물건 수입하듯이 취급하고 있는 인성의 메마름. 언어문제로 의사소통도 원활하지 못하는 남녀를 그저 한 집에 같이 살게 하는 것으로 결혼의 모든 과제가 완성되었다고 생각하는 무모함. 이러한 우리의 어리석음은 이 사건과 같은 비정한 파국의 씨앗을 필연적으로 품고 있는 것’이라고 근본적인 원인을 짚었다. 그리고 결혼적으로 ‘21세기 경제대국, 문명국의 허울 속에 갇혀 있는 우리 내면의 야만성을 가슴 아프게 고백해야 한다”고 통렬히 비판하였다. 황티남씨의 죽음도 ’우리 한국사회의 야만성과 미성숙성‘이 빚어낸 결과다.
이번 황티남씨의 죽음을 보면서 작년 ‘탁티황옥씨의 죽음’을 맞아 인권위원회 앞에서 항의하던 이주여성들의 피켓에 적인 글귀가 떠오른다. “ 한국인 여러분, 우리가 안전하게 살 수 있도록 지켜주셔요!” 이들의 애절한 탄원이 이렇게 ‘소귀에 경 읽기’가 되다니! 참으로 부끄럽기 짝이 없다. 이러한 사건을 접할 때마다 소위 이주여성의 인권을 위해 일한다는 단체의 대표로서, 한국사회의 일원으로서 참을 수 없는 분노와 부끄러움, 무력감과 자괴감이 든다. 언제까지 이주여성의 죽음의 행렬이 계속되어야 하는가? 그 답은 있는 건가?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지금 한국의 다문화열풍은 엄청 뜨겁다. ‘다문화 사회’ 담론이 쏟아지고 ‘다문화가족’이 가족의 키워드가 되고 있으며, “‘다문화’라는 말이 들어가지 않으면 프로젝트도 되지 않는다.”고 할 정도로 ‘다문화’ 범람시대다. 그런데 정작 다문화의 담지자인 이주여성들은 존중받고 있는가? 존중은 커녕, 인종차별과 성차별적 시선 속에서 이주여성들이 가족 유지라는 이름 하에 자기의 인권과 목숨을 담보잡혀 살아야 한다면 그런 다문화사회는 허구일 뿐이다. 이제라도 이주여성들의 인권이 보호될 수 있는 적극적이고 실질적인 대책들이 세워져야 한다. 이주여성의 가정폭력 문제가 더 이상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의 문제로 인식되고 해결될 수 있도록 대책이 필요하다.
정부는 차제에 현행 국제결혼이 갖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를 짚어볼 필요가 있다. 영리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결혼중개업체에 의한 이주여성의 상품화, 한국인 배우자들의 인종차별적이고 성차별적인 결혼관, 이주여성의 인권보호 보다는 가족유지와 동화에 초점을 둔 정부의 사회통합정책과 위장결혼 방지라는 이름 하에서 추진되고 있는 폐쇄적 체류 정책으로 인한 이주여성의 인권상실 등 근본적인 문제들을 점검해보아야 한다. “이주여성들의 인권보호를 위한 정책을 마련하라”는 유엔여성차별철폐위원회와 인종차별철폐위원회의 권고안을 이행할 수 있는 법적 제도적 장치들을 마련해야 한다.
정부의 노력뿐만 아니라 한국사회의 성찰과 반성이 필요하다. 후안 마이, 탁티 황옥, 간체첵 씨등 일련의 가정폭력에 의한 이주여성의 죽음이 칼을 휘두른 당사자의 책임만이 아니라 한국인들의 인종차별과 성차별적 편견이 갖고 온 결과이며, 결혼이주여성이 당하는 폭력을 방조한 결과라는 자각을 갖고 이주민을 사람답게 대하는, 이주민과 더불어 사는 그런 열린 사회로 갈 수는 없는 걸까?
지난 여름 탁티황옥의 죽음을 듣고 김수철의 “못다 핀 꽃 한송이”를 떠올렸다. 이번 황티남의 죽음 앞에서 천상병 시인의 ‘나무’라는 시가 떠오른다.
“사람들은 모두 그 나무를 죽은 나무라고 그랬다.
그어나 나는 그 나무가 죽은 나무은 아니라고 그랬다.
그밤 나는 꿈을 꾸었다.
그리하여 나는 그 꿈속에서 무럭무럭 푸른 하늘에 닿을듯이
자기를 펴며 자라가는 그 나무를 보았다.
나는 또다시 사람을 모아 그 나무가 죽은 나무는 아니라고 그랬다.
그 나무는 죽은 나무가 아니다.”
천상병 시인의 시처럼 황티남은 죽은 나무가 아니다.
죽은 나무처럼 보이는 황티남 나무라는 기둥에서 가지 잎이 피고 줄기가 하늘로 치솟아 이주여성들이 기펴고 사는 세상이 열릴 것이다.
황티남은 그냥 죽은 나무가 아니라 인권의 그루터기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