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세상이 말하는 50대의 모습이 됐다.
성공한 남편과 다 자란 아이들 사이에 낀 초라하고 작아 보이는 50대.
그것이 내 모습인 것이다.
무엇이 그렇게도 날 쫓기게 했는지
허둥대며 부지런히 사라온 세월만큼 허허로운 마음의 깊이도 큰 시간이었다.
이런저런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나에게
“내가 지고 가는 일의 무게가 너무 무거우니 조금만 함께 할 수 없겠냐”
는 친구 이야기에 가볍게 OK 하고 봉사하는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이주(외국인)여성인권센터라는 말도 벅차게 들리고
서울의 달동네인 창신동 산 중턱에 있는 사무실을 오르는데도 땀이 범벅이 됐었다.
나는 방글라데시에서 온 철없고 순진한 20대 산모와
인형처럼 이목구비가 뚜렷한 예쁜 아이를 돌보느라
창신동 산 중턱을 날마다 올랐다.
여러가지 염려가 나를 옥죄였다.
산후조리기간 동안 산모의 휴유증은 없는지, 산후조리는 잘 되고 있는지,
갓난아이가 설사를 하는지, 토하진 않는지 보채지는 않는지,
젖을 잘 먹는지 등을 살폈지만 그래도 자주 병원을 들락거렸다.
조금만 주의를 소홀히 하면 아니는 설사를 했고,
이틀을 쉬고 갔더니 아이의 몸엔 땀띠가 떡이 되어있었다.
땀띠 때문에 병원에 달려가면서 얼마나 한심한 생각이 들었었는지…
날마다 똑같은 이야기를 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 산모에겐 시행착오가 일어났고,
그 엄마가 살아온 삶의 질이 내가 보아온 것과는 사뭇 차이가 있었으니
우린 서로에게 쉽지 않았던 것이다.
그때마다 나는 독일에 살았던 시절의 우리 모습을 생각했다.
내일을 위해 큰 꿈을 이루겠다는 생각보다는 돈을 벌어야 하는
절박한 현실에 온 힘을 쏟고 살았던 그 어려웠던 시절.
모든게 생소했던 그 땅에서 우리도 시행착오를 많이 했었다.
지금도 생각하면 가슴시린 이야기 하나
–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살았던 동료는 남편이 야근하러 가고
동료가 낮 근무를 마치고 집에 도착하는 동안 두 시간의 공백이 있었다.
그 동안 아이를 침대 다리에 끈으로 묶어 두어야 했었다.
아직 말로 의사표현을 할 수 없는 어린아이를 혼자 두었으니
얼마나 아이가 울었는지 집에와 보면 아이의 얼굴이 엉망이 되 있었다.
엄마도 함께 목놓아 울곤 했었다.
나는 그런 아픈 기억들을 치유하느라고 이 일을 하는지 모른다.
한달이 넘도록 산후조리기간을 가진 엄마는 돌아가는 날까지
혼자서 아이를 잘 키울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을 남겨주고 떠났다.
조금씩 봉사하는 식구들이 늘어나면서 일도 많아졌다.
대부분 작은 가내 공장이 밀집되어 있는 동대문 주위는
동남아에서 이주해온 노동력의 집결지이다.
어느 날 우리는 튼튼한 사내아이를 기르고 있는 한 베트남 가정을 방문하게 되었다.
초등학교 고학년쯤 되는 아이의 체격을 한 깡마르고 어려보이는
그 엄마에게 아이는 너무도 커 보였기 때문에 나는 깜짝 놀랐다.
아이보다는 엄마를 돌보는데 신경이 더 쓰였다.
혹시나 하는 걱정에 보건소에 보내서 결핵과 기본 검사를 했다.
다행히 특별한 것이 없어서 안도는 했지만 여간 안쓰러워서
영양제와 과일을 사다주고 점심 식사 때 무엇을 먹는지 유심히 살피게 됐었다.
삶은 야채와 밥을 먹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되었고,
지극히 간편한 가재도구와 조리시설을 보면서 나는 걱정만 늘어갔다.
아이는 별탈 없이 자라주어서 다행스러웠다.
8개월쯤 자라서 아이는 본국의 시어른께 보내졌고, 엄마는 다시 일을 하게 됐다.
근무를 하기 때문에 엄마를 만날 수 없는데 요즘은 건강하게 지내는지
일에 너무 지치지는 않는지 시집간 딸을 걱정하는 엄마의 마음같이 항상 안쓰러운 생각이 떠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