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열두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가
결혼한지 한달만에 이혼을 하고 갈 곳이 없다면 우리 쉼터에 왔다. 어리디 어린 신부를 보면서 우리 모두 충격을 받았다.
그녀가 우리 쉼터에 처음 왔을 때 말은 하나도 안통하고
그나마 손짓 발짓 하며 묻는 말에 울먹이며 대답을 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할 따름이다.
신상을 좀 알아보기 위해 이름과 나이를 물어봤을 때 손가락으로 18살을 표시해 사실인가 싶어 외국인 등록증을 확인해보니 86년생이다.
그 어린나이에 말도 안통하고 무엇보다도 마음도 안 통했을 결혼, 자발적이었을리가 없다.
처음 왔던 이야기 -> 엄마 배고파
쉼터에 와서 안심이 되었는지 한 마디 하는게, 엄마, 배고파! 밥을 주니 엄청먹는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처음에는 주위에 아는 사람도 없고 원치 않는 결혼에서 막 탈출(?) 해온 터라 울기도 많이 울었다.
차츰 이 동네에 사는 모성보호팀 지원을 받은 베트남 출신 이주여성들의 방문과 도움, 그리고 말은 안 통하지만 쉼터에 같이 지내는 이주여성들과 우리 센터분들과도 친해져 엄마, 언니라 부르며 어린아이처럼 붙어 다니고 울음 대신 웃음을 보여주었다.
차츰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한국말을 잘 못하기에 [나와우리]에서 활동하는 이성동님께 베트남어 통역 도움을 받았다.
그녀의 가족은 아버지는 쌀농사를, 어머니는 식료품 가게를 운영하시며 위로는 언니와 오빠, 밑으로는 4명의 동생이 있다. 학교는 중학교 3학년 중퇴인데 동생들이 많아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공부를 계속 할 수 없었다. 이후 미용기술학원에서 미용기술을 배웠지만 그 미용실은 소위 퇴폐업소처럼 보였다. 미용 후 맛사지를 해주면서 성적 서비스를 제공하기도 하는 곳이었다. 어느날 이웃집 아주머니가 한국남자와의 결혼을 알선했다. 그녀는은 싫디고 했지만 아주머니는 여러번 그녀의 집을 방문해 부모님과 친척들을 설득했고 집에서도 이젠 일하는 게 아니고 시집가는 것이니 힘들게 없다고 결혼을 부추겼다.
호치민 시 어느 곳에서 남편을 만났다. 여자들 여럿이 있는 공간에서 번호표를 달고 있으면, 한국남자가 있는 여자들을 한바퀴 돌고 마음에 드는 여자 번호를 지적, 옆방에서 결혼통지를 받는다. 그때 한번 보고 결혼식 하고 다음날 남편은 한국으로 돌아갔다.
원치 않는 결혼으로 괴로워하는 그녀와는 달리 가족들은 좋아했다. 그녀가 한국에서 돈을 보내주길 기대했다고 하는데 말도 통하지 않는 곳에서 어떻게 살아갈지 막막한데 가족의 그런 기대 때문에 더괴로웠다.
결혼식 때는 많이 울었다고 한다. 미용기술을 배워 가게도 차리고 스무살이 넘으면 결혼도 하려고 했지만 그녀의 꿈은 번호표를 보고 찍은 한국 남성과 가족의 터무니없는 기대에 무시당해버렸다.
그리고 원치 않는 결혼생활. 남편과 말도 안통하는데 마음이 통할 리 없었다. 그녀는 결혼을 온몸으로 거부했고 , 나중에는 자해까지 하기에 이르었다. 시댁 식구들은 자기들에게 무슨 일이 생길가 바 겁이 나서 이혼을 허락했다. 마음과 몸에 상처를 입고 나서야 결혼생활을 끝내게 됐다.
쉼터에 와서 그녀는 아팠던 몸을 돌보게 됐고 상담으 받으면서 상처받은 마음도 어루만지게 되었다.
할 줄 아는 말이 엄마, 언니, 오빠 분이었으니, 말이 안통하는 곳에서 한달동안 감옥살이를 한 셈이다. 쉼터에 있는 아기를 보면 고향 엄마 생각이 난다며 눈물로 얼굴에 범벅을 했다. 그만큼 그녀는 가족이 그리웠지 않았나 싶다. 우리 센터 근처에 사는 베트남 이주여성들이 한국에 오려면 돈도 많이 들고 힘든데, 가지 말고 이곳에서 돈 벌며 살라고 권유했음에도 그녀는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마침 [나와 우리]에서 베트남 전쟁 역사탐방을 가기로 되어 있다기에 그 편에 보내기로 했다. 다행이 탐방 팀에서 비행기 표를 사주었다.
그녀는 고향에 돌아가도 자기 집으로 갈 수 없다. 그 나라에서는 이혼을 수치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 동네에서 살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오빠가 있는 호치민에 가서 배우던 미용기술 더 배워 미용사가 되겟다고 했다.
고향으로 가기 전날 쉼터와 센터 식들이 점심식사를 함께 했다. 센터에서 호치민에 가서 두달동안 살 수 있는 약간의 돈을 선물했다. 저녁에는 잘 먹는 통닭도 사주고. 모두 어린 딸을 , 동생을 보내는 마음으로 안스러워 했다.
그녀는 그동안 함께 했던 엄마들, 언니들과 이별하는 것이 아쉬웠던지 일일히 안기며 눈물이 가득한채 인사를 하였다. 모두들 인사말이 “잘 살아!”였다. 내일 아침 새벽에 공항에 도착해야 하기 때문에 우리 집에 데리고 가서 가서 자고 그 다음날 공항으로 행했다.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는 날에는 곱게 화장도 하고 예쁜 옷도 골라 입었다.
며칠전까지만 해도 집에간다고 좋아하던 그녀에게 집에가서 좋아요? 라고 물어보며 얼굴을 보니 눈물 범벅이다. 그녀는 올 때와 마찬가지로 갈때도 또 울었다.
얼마 안 되는 기간에 정이 든 사람들과 헤어지려니 ,언니, 엄마라 부르던 한국식구들이 그리울 것 같았나 보다.
그녀는 “언니 고맙습니다.”라고 했다. 그동안 고맙다는 말을 배웠나보다.
나는 “잘살아요. 잘살아요… 잘살아요…” 목이 메어서 이 말 밖에 못했다.
꼭 잘살아요.
정영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