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거울처럼 희미할지라도!

                                                               한국염

지난 3월 14일부터 닷새 동안 필리핀엘 다녀왔습니다. 두 가지 목적에서였지요. 필리핀에서 이주노동자 귀환프로그램을 하고 있는 “운라드 카바얀”이라는 단체를 방문해서 어떻게 귀환프로그램을 실시하고 있는지 돌아보기 위한 것이 한 목적이고, 또 하나는  “아시아이주노동자포럼” 본부를 방문해서 우리 센터가 주관할  ‘아시아이주여성포럼’을 협의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먼저 귀환프로그램을 알아보기 위해 마닐라에서 비행기로 두 시간 정도 걸리는 민다나오 섬에 있는 다바오로 향했습니다.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는 말처럼 좁은 비행기 안에서 내 눈에 들어온 것은 한국 남자와 나란히 앉아있는 필리핀 여자였습니다. 몇 쌍이 보였는데, 그 중에도 두 쌍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한 쌍은 젊은 남자와 젊은 여자로 이루어진 쌍이었는데 표정도 밝아보였다. 다른 한 쌍은 오십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와 20살 초반의 여자였는데 침울한 표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대조적인 두 쌍을 보며 혼자 나름대로 상상의 나래를 펴가며 많은 생각을 하였지요.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그 젊은 쌍은 아마도 일본 남자와 필리핀 여성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입니다. 민다나오에 일본 사람들이 많이 들어와 사는데 일본 청년이 필리핀 여성과 결혼을 하거나 동거해서 사는 경우가 많다 네요. 현지처 성격도 있고요. 현지처 말을 들으니 우리나라가 가난하던 70년대 일본 사람들이 한국에 들어 와 데리고 살던 현지처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국가와 가정의 가난을 등에 짊어진 여성들이었지요. 그 여성들을 민다니오 섬에서 보게 되니 참으로 씁쓸했습니다. 태국의 경우에서도 현지처를 보았지요. 나이 많은 백인 노인이 젊은 아니 어린 손녀 뻘 되는 태국여성의 허리를 끼고 관광지를 누비고 다니는 것은 흔히 볼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어쨌든 대부분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경우는 일본이나 한국에 사는 남자가 배우자를 찾아  오는 경우라고 하네요. 다바오에서 한국 식당에 들린 일이 있는데 직업이 직업인지라 한국 남성과 필리핀 여성 사이에 이루어지는 국제결혼에 대해 물어보았지요. 한국 남성과 민다나오에 사는 필리핀 여성이 결혼식을 마치면 한국식당에 와서 피로연을 한다고 하는데 그 숫자가 나날이 증가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곳에서 들은 이야기도 이미 알고 있는 대로 한국 국제결혼정보회사와 관계를 맺고 있는 결혼중개업자들이 신붓감을 신청 받거나 물색에 나서서 신붓감을 확보하고 한국에서 오는 신랑들이 마음에 드는 여자를 선택하면 결혼으로 이어진다. 이 과정에서 신부 측에 선물조로 현금이 주어지고 다달이 얼마를 보낸다는 약조가 이루어지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들을 현지에서 확인하면서 한숨이 저절로 나왔습니다. 운라드 카바얀을 운영하고 있는 대표에게 이런 사실을 이야기하며 국제결혼에서 한국생활에 적응이 실패해서 귀국한 여성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들은 바가 없다 네요. 다른 나라에 일하러 나가서 귀환하지 못하거나 일단 귀환했다가도 가족과 사회에 재통합을 하지 못해 힘들어하는 이주노동자들의 문제에 집중하다보니 미쳐 국제결혼 문제까지는 신경을 못 써서 관심 있데 듣지 못했다고 실토하더군요. 한국식당에 다시 가서 물어보았더니 거기서도 같은 대답을 했습니다. “돌아 온 사람들 이야기는 못 들었노라”고. 현재 한국남성과의 국제결혼에서 중국에 이어 베트남과 쌍벽을 이룰 정도로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필리핀 여성들,  그 필리핀 여성들이 결혼생활을 지속하지 못한 이야기들이 간간히 들리고 있는데, 그 여성들은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십중팔구는 한국에서 미등록노동자로 부초처럼 떠돌며 살고 있을 터인데 이 여성들의 삶을 어찌할꼬! 참으로 안타까웠습니다.
한국에서의 인권문제는 우리 엔지오의 몫이라고 쳐도 국제결혼의 폐해를 줄이기 위해서는  신부의 나라와 신랑의 나라 엔지오가 연대하는 것이 효율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운라드 카바얀 책임자에게 기왕 이주여성을 위해 일을 하니 잘못된 국제결혼을 막는 일에 함께 하자고 제안했습니다.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면서 비록 이주노동자 귀환프로그램을 전문으로 일하는 단체지만 실태조사나 한국에 대한 올바른 정보를 제공해서 허황된 코리안 드림이나 사기성 내지  인신매매성 결혼 피해를 줄이는 길을 공동으로 모색하기로 했습니다.    

마닐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도 또 몇 쌍을 보았습니다. 그 중에는 처갓집에 부인과 함께 방문 온 가족도 섞여 있었고요. 이 정도 되면 그 여성은 어느 정도 정착을 했다고 볼 수 있겠지요. 왠지 안도의 숨이 나왔습니다. 꼭 시집보내놓고 마음 조리다가 잘 산다는 소식에 안심하는 친정 엄마 같은 느낌이 들었지요. 전 제삼세계의 여성들이 국가와 집안의 가난 때문에 어절 수 없이 결혼이라는 방법을 통해 한국에 이주하는 것이라면, 이유와 사연이, 또 과정이 어찌되었든 한국에서 행복하게 살기 바랍니다. 제삼세계 여성들과 결혼하는 대부분의 한국남성들, 그들 역시 한국사회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같이 어려운 사람들끼리 역지사지 입장에서 보듬어 안고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이주여성들이 꿈꾸었던 코리안 드림이 좌절과 상처로 남지 않고 현실화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아시아의 나라들이 함께 발전하여 여성들이 가난 때문에가 아니라 사랑에 의해 한국국경을 넘나드는 그런 날을 꿈꾸어 봅니다. 비록 지금은 그 전망이 뿌연 거울 같이 희미하게 보일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