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여성폭력추방주간 기념 여성폭력 근절을 위한 여성단체 공동 기자회견
우리는 ‘생존’ 외에 ‘다른 꿈’을 꿀 수 있는 세상을 원한다
우리는 여성폭력 생존자의 입장을 고려하는 경찰을 원한다.
연초부터 경찰의 늑장대응으로 수원의 한 20대 여성이 무참히 살해되는 사건이 일어났고, 연이어 가정폭력 피해자의 구조요청을 경찰이 ‘장난전화’로 둔갑시킨 일이 발생했다. 112에 접수된 전화로 다시 전화를 걸어 가해 남성에게 신고여부를 확인하는 어이없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피해여성의 안전을 고려하기는커녕 가해자의 말을 믿고 출동하지 않은 경찰 덕분에, 피해자는 110시간 동안 감금․폭행당했다. 또한 여러 번 구조요청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적절한 조치를 받지 못한 가정폭력피해 이주여성들이 연이어 남편에 의해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피해여성의 실낱같은 희망이 바로 그들이었다는 것을 경찰이 조금이라도 알고 있었다면, 이렇게 심각한 무관심과 무대응을 일삼지는 않을 것이다.
여성폭력에 대한 무관심과 대책 없음은 비단 경찰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최소한 여성폭력의 가해자가 검찰이 아니길 원한다.
검찰의 여성폭력에 관한 인식수준은 도를 넘어섰다.
지난 10월 1일, 검찰수사에 항의하며 61세 피해여성이 투신해 사망했다. 피해자는 “화간은 가해자가 꾸민 말이고 사실이 아니다”라는 유서를 남겼다. 유서에는 조사과정 내내 피해를 의심받아온 그간의 고통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검찰은 성폭력 가해자의 ‘화간’ 주장에 무게를 싣고 경찰의 구속영장신청을 수차례 반려하고, 단 한 번의 소환조사로 끝난 가해자와 달리 피해자에게는 6번에 걸친 조사를 받게 했다. 이 여성을 죽음으로 내 몬 것은 바로 검찰이다.
지난 11월 24일에는 서울동부지검 검사가 피의자 여성에게 수차례 성폭력을 행한 사실이 드러났다. 더 놀라운 일은 피해여성이 성폭력이라 주장하고 있음에도 검찰은 ‘대가성 있는 향응’이라며, 성폭력이 아닌 ‘뇌물수수혐의’로 구속영장을 청구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성폭력 사건을 축소․은폐하는 수준을 넘어, 여성의 몸을 물건으로 취급했다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를 가진다.
여성폭력에 대한 검찰의 인식 수준은 이 정도이다. 이는 수사기관에 의한 2차 가해도 아닌, 명백한 1차 가해다. 더 기막힌 일은 기소독점주의로 인해 검찰이 저지른 범죄를 검찰이 수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납치․폭행 가해자의 ‘취업’보다, 인권을 우선하는 법원을 원한다.
법원은 올해에도 어김없이 여성폭력 가해자들에 대한 관용을 잊지 않았다.
가해자에게서 벗어날 길을 힘겹게 찾아 법원까지 온 여성들은, 그동안의 고통을 증언하며 부부상담 명령만은 말아달라고 호소했으나, 가정폭력 피해자에게 ‘부부상담’을 받으라는 법원명령은 끊이지 않았다. 한편, 노래방 도우미 일을 하던 여성에게 성매매를 강요하고, 이를 거부하자 밤새 폭행․감금한 가해자의 ‘취업’을 걱정해 벌금형으로 처분하는 사건도 있었다. 피해자의 인권보다 가해자의 취업이 더 걱정인 법원은, 한국사회에서는 여성을 감금․폭행해도 몇 백만 원 정도의 돈만 있으면 해결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법원의 태도는 여성폭력 ‘가해자’를 양산하고 피해자의 인권을 말살하는 데에 ‘기여’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여성폭력에 무지한 정부는
개인정보 보호가 여성폭력 피해자들에게는 ‘생존’의 문제라는 것부터 알아야 한다.
대한민국의 여성폭력에 대한 인식부재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정부는 2004년부터 꾸준히 폭력피해여성과 아동의 개인정보를 사회복지시설정보시스템(이하 사복시)에 입력할 것을 종용해왔다. 입력하지 않을 경우 생계비는 물론 의료비와 교육비를 끊겠다며 줄기차게 위협해왔고, 실제로 지난 3월 사복시사용을 거부한 시설에 대해 생계비 등 지원이 끊기기도 했다. 그동안 여성폭력피해자 시설이 사복시 사용을 거부해온 이유는, 여성폭력 피해자에게 있어 정보보호는 곧 생존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내담자의 주민등록번호 등 개인정보, 시설정보의 공유 및 집적은 신변호보가 최우선인 피해자가 사회적 지원 자체를 포기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실제 2012년, 여성폭력피해자가 직업훈련을 받을 경우 주민번호입력이 필수로 시행됨에 따라, 피해여성들은 직업훈련을 받지 못하거나, 신변노출과 낙인의 위험을 감수해야만 했다.
지금도 충분히 늦었지만,
미래의 대통령은 여성폭력 근절이 모든 폭력의 종결을 의미함을 알고
국정 제1과제로 삼아 적극적인 예방과 근절정책을 시작해야 한다.
여성폭력에 대한 총체적인 무지와 무관심 속에서 2012년 11월 현재 남편과 남자친구 등 친밀한 관계에 있는 남성에 의해 살해된 여성이 최소 112명인 것으로 집계됐다. 이는 언론에 보도된 건수만 집계한 것일 뿐, 보도되지 않은 사건을 합한다면 훨씬 더 많은 수의 여성이 살해됐을 것이라 예측된다. 여성폭력은 너무 일상적이어서 심각한 범죄로 이어지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이처럼 많은 여성들이 생명을 박탈당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여성폭력은 가해자의 마음먹기에 따라 집 안팎에서, 밤낮으로, 곳곳에서, 흔하고도 쉽게 벌어진다. 그리고 출동하지 않는 경찰, 처벌하지 않는 법원, 여성폭력에 무지한 검찰과 정부부처가 연합해서 여성폭력을 확산하고 뿌리내리는데 기여하고 있다. 지난 22일 친고죄가 폐지되어 성폭력 피해자의 고통이 한층 덜어질 것이라 예측되지만, 여성폭력 문제 해결에 있어 남은 과제는 앞으로도 산적해 있다.
18대 대선을 앞두고 각 대선 후보들의 경쟁이 뜨겁다. 하지만 대선정책에 여성폭력 문제해결을 위한 정책공약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구색맞추기식의 한 줄 공약이 그들이 내놓은 여성폭력근절정책의 전부다. 이 한 줄로 죽어가는 여자들의 행렬을 막을 수 있다고 보는가. 이 한 줄로 실핏줄처럼 만연한 여성에 대한 폭력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을 거라 기대하는가.
세계여성폭력추방주간을 맞아 이 자리에 모인 우리들은 여성폭력 근절을 위한 정책이 국정 제1과제가 되어야 함을 강력히 주장한다. 여성폭력이 근절되어야 모든 폭력이 사라질 수 있다. 차기 대통령은 여성폭력근절을 국정 제1과제로 선정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여성가족부는 2011년부터 세계여성폭력추방주간을 ‘성폭력추방주간’으로 명명하여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이는 단순히 행사제목이 바뀐 문제가 아니다. 여성폭력은 협의의 성폭력 뿐 아니라 모든 여성에 대한 다양한 형태의 폭력을 포함한다. 여성가족부의 성급함과 무지함으로 인해 여성폭력이 축소·왜곡되고 있다.
여성폭력정책이 구색맞추기식 공약으로 남아있는 한, 여성폭력을 단순히 개인의 일탈로 환원하는 한, 여성폭력을 인간의 생명권과 안전권을 침해하는 중대한 범죄로 보지 않고 가해자에 대한 처벌을 지속적으로 보류하는 한, 여성에 대한 폭력은 근절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여성에 대한 폭력을 조장하고 방임하는 사회문화적 조건이 변하지 않는 한 사회의 각종 폭력들도 사라질 수 없다. 여성폭력 문제 해결 없이 정의와 인권을 말할 수 없다.
우리는 세계여성폭력추방주간을 맞이해 여성폭력근절을 위한 적극적인 대책마련을 강력히 촉구한다.
● 우리의 요구
1. 여성에 대한 폭력은 가장 기본적 권리인 생명권과 안전권을 침해하는 중대한 범죄이다. 차기 대통령은 여성폭력 근절을 국정 제1과제로 삼아라.
2. 여성폭력은 개인의 일탈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여성폭력을 가능하게 하는 성차별 등 사회문화적 조건들을 변화시키기 위한 노력을 구체적으로 실시하라.
3. 경찰, 검찰, 법원은 각 기관 관련자를 대상으로 여성폭력에 대한 통합적 인권교육을 의무화하라.
2012년 11월 27일
성매매문제해결을위한전국연대(전국 11개 단체), 전국가정폭력상담소협의회(전국 134개소), 전국가정폭력피해자보호시설협의회(전국 62개소),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전국 129개소), 전국성폭력피해자보호시설협의회(전국 20개소), 전국이주여성쉼터협의회(전국 19개소), 한국성폭력상담소, 한국여성단체연합, 한국여성의전화(전국 25개 지부),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 UN인권정책센터(이상 가나다 순)